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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들어라, 여성 농민의 목소리를!

등록 2021-11-19 05:00수정 2021-11-19 22:12

호미
정성숙 지음 l 삶창 l 1만4000원

“평생을 밭고랑 기어 댕겨서 손에 쥐어진 것이 뭣이겄냐. 이녁 새끼나 알아주는 훌륭한 골병에다 쳐다보기도 아깐 빚덩이밲에 더 있냐!”

정성숙(사진)의 소설집 <호미>에 실린 단편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힘든 농사일과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 미애가 동네 친구인 ‘나’와 전화 통화에서 하는 말이다. 그 자신 전남 진도에서 32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정성숙 작가가 펴낸 첫 소설집 <호미>에는 미애와 같은 여성 농민들의 삶과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책에는 여덟 단편이 실렸는데, 이 가운데 표제작을 포함해 다섯 편이 여성 농민의 삶을 그린다.

“크라는 파는 대고 오그라드는데 오살할 놈에 새비린 잎은 바람난 과부 년 넙턱지 퍼지대끼 한당께.”

표제작의 주인공인 영산댁은 산 너머 외딴 대파밭에서 혼자 호미로 풀을 뽑는 일을 한다. 막걸리 한 병으로 끼니를 대신하고, 아리랑 노래로 벗을 삼는다. “논두럭에 개구리는 배암 간장 녹이고 밭고랑에 지심은 내 간장을 녹이네에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아 났네에.”

막걸리에 취해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영산댁은 갑자기 몸 한쪽에 마비가 오고, 할 수 없이 호미로 땅을 박아 가며 힘겹게 산을 기어 내려간다. 어느덧 사방은 어둠에 잠기고, “퍼억! 스으으윽. 뱀이 풀숲을 지나는 소리보다 낮게 굼벵이의 빠른 걸음보다는 느리게” 산길을 내려가는 영산댁이 마침내 집에 도착하거나 도중에 사람과 마주쳐서 도움을 받게 될지 여부는 불확실한 채로 소설은 문득 끝이 난다.

정성숙 작가
정성숙 작가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화자인 ‘나’는 가출한 미애와 그의 남편 창선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미애의 하소연은 그것대로 설득력이 있고 어린 아들과 단둘이 남은 창선의 딱한 처지 역시 공감이 가는 것. 소설 말미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게 된 고추를 불에 태워버리겠노라며 날뛰는 창선의 모습은 팍팍한 농민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베트남 신부를 기다리며 복숭아 나무를 심는다는 ‘복숭아나무 심을 자리’의 결론이 미약하나마 희망의 근거를 보인다면, 다른 대부분의 수록작들은 어둡고 답답한 가운데 마무리된다. ‘놈’이라는 작품에서 한 농민이 푸념 삼아 내뱉는 말에 소설집 전체의 주제가 들어 있다 하겠다.

“애쓰고 일하믄 일한 만치 빚이 덜어져야 할 것인데, 어찌케 된 시상인지 애를 쓰믄 쓸수록 빚이 불어나니 뭣이 잘못되었어도 한참 잘못되었당께!”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삶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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