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미국 중심으로 들여다본
21세기 위기의 시대
정치 실패 넘어서려면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밖에
21세기 위기의 시대
정치 실패 넘어서려면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밖에

위기에 빠진 21세기 세계의 해부
도널드 서순 지음, 유강은 옮김 l 뿌리와이파리 l 2만원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영국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이 지은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로 시작한다. 대공황 1년 뒤, 히틀러 집권 3년 전인 1930년에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위기란 지배계급들이 기반을 잃고 그들을 떠받치는 합의가 시들해지며, 대중에 대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장악력이 허물어지는 것. 공백의 특징은 불확실성.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짓눌린다. 1930년대 그람시의 시대진단이 21세기를 조망하고 묘사하는 데 유효할까? 지은이의 답은 ‘그렇다’이다. 질문과 답변 사이에 382쪽의 긴 논증이 들어 있다. 유럽 이야기를 주로 하고 미국 이야기를 덧붙인 모양새라 대개는 지루하고 일부는 흥미로운데(미국이 대세인지라 어쩔 수 없다), 정신 바짝 차리고 들여다보면, ‘아재개그’ 식으로 풀어가는 영국인 특유의 고집스런 기술이 나름 귀엽다. 맛 뵈기 개그. “(이 책은) 내가 쓴 몇몇 전작들에 비하면 무척 얇다.” 그가 말한 전작이란 <유럽문화사 Ⅰ~Ⅴ>(2790쪽), <불안한 승리, 자본주의의 세계사 1860~1914>(1088쪽), <사회주의 100년, 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 1, 2>(1792쪽). 이번 책이 382쪽에 불과하니 맞은 말이긴 한데, 쩝. 지금은 병든 시대.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럽인들은 전통적인 정치인들에 분노하면서 유럽연합에 회의적이거나 이민을 반대하는 정당에 투표하거나 아예 투표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비정치인에게 표를 던진다. 부동산과 방송(도널드 트럼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금융(에마뉘엘 마크롱), 코미디(베페 그릴로), 식품산업(체코 지도자 안드레이 바비시) 등의 최고경영자(CEO). “지금은 거인들에 대한 기억을 잃은 난쟁이들의 시대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도 다르지 않다. 말을 바꾸면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는 유럽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곳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있다. 특별히 놀랍지도 않은 것이, 좌파정당들이 우파의 신자유주의 의제를 많이 받아들여 제 기능을 상실한 탓이다. 긴축정책을 받아들이고 임금이 정체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도록 방치했으며 30년 전만 해도 상상치 못할 규모로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수혜자들에게 과감하게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이제는 국제통화기금(IMF)조차 부유층에 대한 세금 인하가 생산성을 끌어내리고 불평등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난 2020년 3월 이탈리아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국적인 차원에서 이동 제한령을 내린 가운데 북부도시 밀라노의 중앙역에서 군인들이 승객들의 여행을 통제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유럽연합은 공동체를 지키기보다 각자도생하기에 바빴다. 21세기 대표적인 병적징후인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이다. 부유한 국가들은 백신을 독점하고 제조법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바이러스 변이 발생을 방조하며 인류를 더욱 큰 위협에 빠뜨리고 있다. 밀라노/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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