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지중해, 2권 아시아 펴내고
17~20세기초 근대성 지도그린 철학사
17~20세기초 근대성 지도그린 철학사

근대성의 카르토그라피
이정우 지음 l 길 l 4만원 역사학에는 사학사, 사회학에는 사회학사, 그러니까 모든 학문에는 그 학문의 역사가 있으며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연구 분야다. 철학과 철학사의 관계는 다르다. 철학사는 철학의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철학 연구의 기본이다. 철학 공부는 철학사 공부와 사실상 같은 말이다. “왜 철학이 아니라 철학사를 연구하느냐?”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철학은 곧 철학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정우 교수의 <세계철학사 3: 근대성의 카르토그라피>는 각각 2011년과 2018년에 내놓은 제1권 ‘지중해세계의 철학’, 제2권 ‘아시아세계의 철학’에 이은 책이다. 지중해와 아시아가 드디어 근대에서 만났다. 카르토그라피는 지도학(地圖學), 지도 제작이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근대성의 지도를 그린다는 뜻일 것이다. 지도는 세부 사항을 담아내면서 지형지세를 전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 책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를 어떤 체제로 망라하면서 동시에 꿰어내고 있는가? 1부 ‘자연의 새로운 상(像)’은 과학기술, 근대적 합리성, 과학혁명을 다룬다. 핵심 철학자는 데카르트이며 동북아시아의 기학(氣學) 전통을 잠시 검토한다. “<향연>의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서 절대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발견해낸 것과 대조적으로, 데카르트는 회의의 망치로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는 지식의 지반들을 하나하나 해체해 그 근거를 무너뜨린다. 하지만 그 역시 이 과정의 마지막에서, 절대의 회의와 불안감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가장 ‘확실한’ 것으로서 선포하게 될 제1원리를 발견해내었다.” 2부 ‘표현의 형이상학’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저자가 ‘근대적인 기 일원론’으로 규정한 왕부지(王夫之)의 철학을 비중 있게 검토한다. “스피노자에게서처럼 왕부지 역시 모든 것을 내재적으로 이해한다. 인식과 도덕도 이 내재적 형이상학, 기 일원 철학의 구도 내에서 이해된다. 왕부지에게서 인의는 단지 윤리학적 의미만이 아니라 우주론적 의미를 띠거니와, 이는 인의 역시 기 일원의 구도 내에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3부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은 동북아의 실학과 유럽의 계몽주의를 살피고 칸트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뒤 피히테, 셸링, 헤겔을 검토한다. 저자는 실학을 공자 본연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경학(經學)과 당대의 현실에서 유학의 실천적 성격을 되살려 실천하려는 경세학(經世學), 두 측면으로 이뤄진 유학의 자기 혁신 흐름으로 본다. 그 흐름 속에서 조선의 정약용, 중국의 대진, 일본의 이토 진사이가 “동북아적인 형태의 근대적 주체성 개념”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 감정, 욕망에 대한 긍정과 함께 자유의지와 선택에 입각해 삶을 개척하는 주체적 인간상을 정립했다는 것. 4부 ‘시민적 주체와 근대 정치철학’은 홉스, 스피노자, 로크, 루소 등을 검토하고 역사철학과 정치경제학을 살핀 뒤 이슬람, 인도, 동북아시아의 전통과 근대 문제를 다룬다. 아무래도 조선에 대한 평가에 눈길이 간다. 저자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구 계몽사상가들에 버금가는 급진적인 사상을 펼쳤으며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에 비해 활력이 두드러졌다고 평가한다. “사상사에서 두드러진 성취, 활력과 현실 역사에서 두드러진 몰락 사이의 기묘한 대조.” 저자는 조선 말 시대적 흐름의 한 특이점으로 박은식을 든다. 유학적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흡수하려 한, 조선 유학 최후의 가능성을 실험한 마지막 선비였다는 것. “박은식의 사유에는 양명학과 사회진화론, 민족주의가 착잡하게 얽혀 있다. 갱신된 유학과 (사회진화론과 민족주의에 입각한) 개화자강의 사상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왕부지가 만나고, 칸트의 선험적 주체와 다른 동북아적 근대 주체성을 검토하는 것에서 책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세계철학사라고 해서 세계 각지의 철학자와 철학적 사유를 단순 망라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연결 지어 하나의 구도에 담아 논하려는 것. 저자 자신은 “동서양 전통을 하나로 통합하려 하기보다는 다만 일정한 방식으로 접합하려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양 전통의 이질성과 간극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근대라는 동시성(同時性)과 그 안의 지역적·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는 균형감각을 발휘했다. 저자는 근대 철학의 성취를 “인간을 주체로서 우뚝 세운 것과 그러한 철학적 기반 위에서 근대적 시민이 주체가 되는 정치철학을 수립한 점”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귀결은 “비유럽 국가들을 침탈하는 제국주의”였으며, 이 귀결을 “근대 철학 자체에 어떤 결함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근대성의 가장 서늘한 측면을 이렇게 지적한다. “생명정치는 인간 개개인을 대상화하고 통계적으로 수량화하고 조작하는 길을 터놓았고, 이는 국가라는 것을 점점 괴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허구적인 보편주의는 서구 중심 가치를 목적론적으로 절대화함으로써 역사를 획일화했고, 제국주의의 철학적 기초로 작동하게 된다. 이런 생명정치와 허구적인 보편주의의 토대 위에 국가주의, 사회진화론, 제국주의가 흥성했던 것이다.” 이 책은 철학과 철학사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한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저자의 철학관과 역사관이 깊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비판적으로 읽기에 좋은 책이다. 저자는 철학사를 통하여 철학을 수행한다.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수행은 뜻깊다. 철학의 회로 안에만 머무는 철학사, 철학 바깥에서 맴도는 철학사가 많다. 저자의 철학사 작업은 철학의 안과 바깥을 자유로우면서도 절제 있게 드나든다. 사상사, 지성사를 겸한다. 드문 성취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스피노자. 위키미디어 코먼스

왕부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칸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박은식.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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