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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과학은 어떻게 픽션이 되는가

등록 2022-02-04 04:59수정 2022-02-04 09:59

전세계 가짜 과학논문 실태
의심받지 않고 돈에 눈멀어
논문 1만 건 중 4건 ‘철회’
황우석·문형인 사례도 등장
코르넬리스 베가의 <연금술사>(1663년, 게티미술관). 연금술사가 실험실에서 금속을 금으로 바꾸려다 실패한 잔해에 둘러싸여 있다. 작가는 금에 대한 집착과 허무함을 표현하는데, 현대 과학이 추구하는 인센티브에 대한 비유로도 읽힌다.
코르넬리스 베가의 <연금술사>(1663년, 게티미술관). 연금술사가 실험실에서 금속을 금으로 바꾸려다 실패한 잔해에 둘러싸여 있다. 작가는 금에 대한 집착과 허무함을 표현하는데, 현대 과학이 추구하는 인센티브에 대한 비유로도 읽힌다.

사이언스 픽션
과학은 어떻게 추락하는가
스튜어트 리치 지음, 김종명 옮김 l 더난콘텐츠 l 1만7000원

2008년 의학저널 <랜싯>에 이탈리아 외과의사 마키아리니가 기고한 기관지 이식에 관한 논문이 실렸다. 기증받은 기관지에 이식받을 환자의 줄기세포를 씨앗처럼 심어 이식환자의 기관지로 키운다는 개념이다. 2년 뒤 ‘천재의사’는 스웨덴 유명대학에 객원교수 겸 부속대학 수석 외과의사로 채용됐다. 2011~14년 모두 7명에게 인공 기관지 이식 수술을 했다. 그는 2014년 <바이오머티리얼>에 발표한 논문에서 세 환자의 사례를 들어 새로운 기술의 ‘경이적인’ 결과들을 설명했다. 첫째, 둘째 환자가 사망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세 번째 환자는 몇 차례 후속수술을 받았으나 2017년 사망했다.)

환자 상태와 논문 내용이 일치하지 않음을 아는 동료 의사들이 대학에 항의했다. (그에게서 수술을 받은 환자는 1명 빼고 모두 사망했다. 생존자는 이식한 인공 기관지를 제거했다.) 대학 쪽은 이들이 환자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결국 외부압력에 굴복해 인근 대학에 사건조사를 맡기는데, ‘과학적 위법 행위’라는 결론이 나왔다. 7편의 논문에서 환자상태가 호전됐다고 거짓말했으며 심각한 합병증, 후속수술에 대한 보고는 누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학 쪽은 별도의 자체조사를 통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근거로 위법행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6년 한 방송사의 이식수술에 관한 탐사보도로 희대의 과학사기 사건이 만천하에 폭로됐다. 마키아리니 자신과 그를 감쌌던 대학 부총장, 노벨상 수상을 추진했던 노벨상 위원회 위원이 줄줄이 사임했다. ‘아무 문제 없다’던 <랜싯>도 마키아리니 논문을 철회했다. 논문 철회는 과학계에서 사형선고에 비유된다. 2018년 중반에 대학 쪽은 뒤늦게 그의 논문에서 과학적 위법 행위를 발견했다면서 그 리스트를 온라인에 공개했다.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오픈 사이언스’(과학정보 공유) 운동가인 스튜어트 리치가 쓴 <사이언스 픽션>에 나오는 과학사기 사건 중 하나다. 조작한 가짜 논문으로 대학교수가 되고, 돌팔이 의사가 대학병원에서 사실상 생체실험을 하고, 실패한 수술이 성공한 수술로 둔갑하고, 대학은 명예 실추가 두려워 이를 감싸는 희한한 일이 메디컬 사이언스 분야에서 벌어졌다는 얘기다. 책은 전세계 과학계의 가짜, 뻥튀기 논문 실태를 고발하는데, 마치 과학소설(SF)를 읽는 듯하다. 하지만 사진 조작을 통해 인간 배아를 성공적으로 복제했다고 사기 친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사건에 이르러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는 현실로 돌아온다. 언론의 대대적인 추앙,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난자기증 행렬 등 온 나라가 그의 사기행각에 놀아나 미쳐 돌아갔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책에는 과학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며 논문 검토자로 가짜신분의 자신을 내세워 논문을 통과시킨 문형인 전 동아대 교수 사례도 등장한다. 그는 35회 논문철회 기록을 보유하여 철회논문 전문 사이트인 ‘리트랙션 워치’ 13위에 올라와 있다.

리트랙션 워치가 2018년 발표한 데이터베이스에는 1970년대 이후 과학문헌에서 철회된 논문이 1만8000건에 이른다. 철회논문은 전체 논문의 0.04%로 1만 건 중 4건 꼴이다. 별거 아니라고? 세계 최대 오픈 액세스 저널인 <플로스 원>(PLOS ONE) 조사를 보면, 1.97%의 과학자들이 적어도 한번은 데이터 조작을 한 적 있다고 시인했다. 자기 외에 다른 사례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이 수치는 14.1%까지 치솟는다. 실제 생명을 다루는 의학 분야에서는 아주 심각한 문제다.

사실이 곧 생명인 과학계에서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까. 지은이는 과학계와 과학논문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본다. 과학이 사실에 근거한 학문인 점이 역설적으로 가짜와 뻥튀기 논문의 원인이 된다. 과학계 어느 누구도 논문이 그러리라고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임은 반복 재현으로써 증명되는데, 3개 심리학 학술지에 게재된 100개 논문을 반복 재현 실험한 결과, 성공한 것은 불과 39%였다(2015년 <사이언스>). 2018년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실린 사회과학 논문은 62%였다. 또 다른 동인은 연구지원금. 긍정적이고 화려하고 혁신적이고 뉴스가 될 만한 연구에 지원금이 쏠린다. 과학자 개인의 채용, 승진과 그가 소속된 기관에 대한 정부 지원금은 논문 편수와 논문이 발표된 저널의 등급에 의해 좌우된다. 2013년 고용된 젊은 진화생물학자가 2005년에 고용된 사람들보다 두 배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생산성을 공작 꼬리와 사슴 뿔이 터무니없이 화려하게 진화한 현상에 비유한다. 논문 한 편을 여러 개로 쪼개어 발표하는 ‘살라미 슬라이싱’, 과학계의 이런 현상에 기생하는 ‘미끼저널’의 존재 등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생산성의 그림자이다.

과학논문은 가설 제기와 검증이 뼈대. 예컨대 ‘남자의 키가 여성보다 클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웠으면 동수의 남성과 여성을 무작위로 뽑아 키 통계를 내어 가설의 성립여부를 확인한다. 이때 노이즈로 인해 같은 결과가 나올 확률인 p값이 0.05 이하일 때 유의미한 결론으로 간주된다. 통계를 내는 과정에서 표본 수, 유효 크기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p값을 꿰맞추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동료 평가를 거쳐 저널에 실림으로써 절차가 완성되는데, 문형인 사건은 그 틈새에서 발생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유의미한 것’ 외에는 발표를 꺼리고 저널에서도 반기지 않는 현상이다. 고고학 발굴에 비기면, 무기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조사대상이 군인 아닌 민간인이라는 해석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지은이는 과학이 에스에프처럼 보일지라도 여전히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식 시스템이라고 믿는다. 나도 거기에 한 표. 그가 과학계의 추문을 폭로한 것이나 오픈 사이언스 운동에 매진하는 것도 그런 믿음에서 비롯한 듯하다.

임종업 <뉴스토마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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