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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피카소에 파묻힌 여성 예술가의 초상

등록 2022-03-18 04:59수정 2022-03-18 17:08

수첩 주인의 비밀 탐색하다 만난
거장의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
주소록 관계망 조각조각 짜 맞춰
‘우는 여인’의 삶과 몸부림 재구성
에르메스 수첩의 비밀

도라 마르가 살았던 세계

브리지트 벤케문 지음, 윤진 옮김 l 복복서가 l 1만7000원

지은이 브리지트 벤케문(63)은 저널리스트에서 출발한 ‘범생이’ 프랑스 작가. 라디오방송 <유럽1>과 <프랑스 텔레비전>에서 일한 바 있다. 늦깎이의 첫 책은 자전적인 기록 <사진 속 어린 소녀>(2012). 어려서 알제리 전쟁을 피해 프랑스로 와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재구성했다. 두 번째는 증조부뻘 선조의 일생을 다룬 <위대한 알베르>(2016).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한 개인의 삶과 1·2차 세계대전을 교직한 다큐멘터리다.

<에르메스 수첩의 비밀>은 세 번째 책인데 2019년 <Je suis le carnet de Dora Maar>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어 초판이 나왔다. ‘나는 도라 마르의 수첩이에요’쯤으로 풀이되는데 한국어판은 추리소설의 그것처럼 바뀌었다. 참고로 영문판 제목은 <Finding Dora Maar>다. (최근 지은이는 <피카소를 위한 삶, 마리 테레즈 월터>(2022)를 펴냈는데, 도라 마르에 앞서 피카소의 네 번째 연인이었던 여성에 관한 탐사물이다.)

범생이 작가라 함은 자기 자신에서 출발해 주변으로 확장하고, 고구마 캐듯 관련 주제를 이어가는 글쓰기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주제에 꽂히면 지겨울 정도로 물고 늘어지는 것도 강박적인 범생이의 특징인데 <에르메스 수첩의 비밀>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도라 마르의 초상. 파블로 피카소 1937년작. 프랑스 피카소미술관 소장. 출처 위키아트
도라 마르의 초상. 파블로 피카소 1937년작. 프랑스 피카소미술관 소장. 출처 위키아트
출발은 남편이 애정하는 에르메스 수첩의 분실. 이베이에서 똑같은 빈티지 제품을 찾아냈다. 갈아 끼우는 속지는 판매자가 제거하고 보냈는데, 속주머니에 작은 수기 전화번호부가 남아 있었다. 알파벳 순으로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기록돼 있고 말미에 이듬해인 1952년 달력이 인쇄된 것으로 미루어 누군가의 1951년치 지인 리스트임이 분명했다.

통상 휴대용 주소록에 본인의 것을 적지 않는다. 또한 주소를 달달 외는 ‘핵인싸’ 역시 기입하지 않는다. 하여, 지은이의 ‘보물’ 탐색은 수풀 속 새 잡기처럼 주소록에 등장하는 인물군을 분야별 지역별로 재정리한 다음 한가운데 빈자리에 위치하고 있을 주인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분석 결과 리스트에는 엘뤼아르, 아라공, 콕토 등 문인과 샤걀, 발튀스, 브라크 등 화가가 많았다. 갤러리 주인, 캔버스 제작자도 포함된 걸로 미루어 어쩌면 화가? 정신과 의사 라캉 주소는 또 뭔고? 단서는 뜻밖에 뭉개진 글자였다. 애초 아비뇽 프티트 퓌스트리가 22번지 ‘Achille de Menerbes’로 판독했던 게 ‘Architecte Menerbes’(메네르브의 건축업자)로 밝혀지면서 급물살을 탔다. 미용사, 배관공 등은 필요하면 부르기 위한 직업군이기에 이웃사람일 가능성 99%다. 초현실주의자들을 지인으로 두고 여성, 화가인데다 1950년대 아비뇽 메네르브에 거주했던 인물. 이 정도면 인터넷 검색으로 끝난다. 피카소의 다섯 번째 연인으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피카소와 지지고 볶으며 동거한 도라 마르(1907~1997)였다. 피(P) 항목에 피카소가 없는 것도 똑 떨어지는 방증이다. 1951년은 피카소와 헤어진 지 6년째 되던 해다. 대박!

발견의 기쁨은 여기까지. 그다음은 주소록에 오른 인물들에 관한 지루한 자료 조사와 정리, 그리고 도라 마르를 축으로 이들의 관계망을 정교하게 짜 맞추는 일이다. “네가 누굴 만나는지 말해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리라.” 책 말미 ‘감사의 말’에서 지은이가 만나 인터뷰하거나 자료를 제공하거나, 자료 해석에 도움을 준 인물들로 거론된 이들은 주소록의 앙상한 뼈대에 피와 살을 붙여준 사람들이다. 생기 불어넣기는 오로지 지은이의 역량. 이 작업은, 4·19 전야 ‘이승만의 꼬붕’ 이기붕에게 보내진 진상품 목록을 바탕으로 당대의 일그러진 사회를 조명한 김진송 작가의 <장미와 씨날코>를 연상케 한다. (이 자리를 빌려 필자가 김 작가의 저술을 미완성이라고 혹평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

도라 마르의 본명은 앙리에트 테오도라 마르코비치. 20대 초반에 패션·광고 사진으로 이름을 떨쳤다. 스물일곱에 영국, 스페인 등을 돌아다니며 대공황이 빚어낸 빈곤과 실업으로 고통 받는 주변부 인물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후 초현실주의 조류 한가운데서 전위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1936년 1월. 피카소가 카페 ‘되 마고’에 들어오는 때를 맞춰 도라 마르는 희한한 행동을 한다. 꽃무늬 검정 장갑을 벗고 테이블에 손을 펼쳐 올려놓은 다음 그 사이에 칼을 꽂기 시작했다. 높이와 속도가 빨라지면서 뽀얀 손가락에서 피가 튀었다. 피를 닦지도, 피카소한테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피카소의 주머니엔 피 묻은 장갑이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의 기이한 관계가 시작된, 유명한 에피소드다. 그해 여름 도라 마르는 피카소를 따라 아지트인 무쟁으로 갔고 그들은 레 살랭 해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 무렵 거장의 그림에는 미노타우르스가 성숙한 여인 위에서 흥분해 날뛰고 있었다. 피카소는 그를 모델로 ‘우는 여인’ 연작을 그려 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으로 사람들 뇌리에 박혔다.

지은이는, 거인 피카소의 연인으로만 기억되고 작품들은 피카소 그림자에 묻힌 예술가의 초상을 재구성해냈다. 파편화한 주소록의 인물들을 조각보처럼 이어붙여 이음매 없는 모양새로 엮은 독특한 구조다. 지은이의 생목소리가 재미를 더한다. 도라 마르가 피카소와 결별한 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고 이를 책장에 뻔뻔하게 진열하고, 친나치 신부와 가까이 지내는 등 우경화하는 대목에서 자신의 저술 작업에 회의를 드러낸다. 하지만 라캉과 오랜 상담을 거치며 마초 피카소의 노예에서 벗어나 독립 작가로 거듭나려 몸부림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며 대상과 화해한다.

지은이의 건실함과 정교함에서 크게 배운다.

임종업 <뉴스토마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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