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사회적 협동조합 행인서원 이동일 이사장
“힘들고 어려운 청소년 친구들과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돈을 받고 그만큼 대가를 치르는 계약 관계에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이죠. 제가 6년째 강사로 ‘노작과 자연’ 과목을 가르치는 현천고(공립형 대안학교) 아이들은 저를 닉네임 ‘찔레’로 부르죠.”
사회적 협동조합 행인서원 이동일(59·사진) 이사장은 2013년 강원 횡성군 갑천면 삼거리 1400여 평 터에 현대식 한옥으로 강학당과 서재, 강당, 살림집을 지었다. 5년 뒤에는 장애인 교육 공간을 염두에 두고 휠체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 건물도 따로 세웠다. 이 서원 건축물은 1990년대 후반 ‘행인 흙건축 회사’를 세워 현대식 흙집 한옥을 60채나 지었던 그가 목수 친구들과 직접 땀을 흘린 결실이었다.
서원은 건립 초기에는 지역 바깥 어린이와 청소년 캠프 공간으로 주로 활용되다 2016년 사회적 협동조합 체제로 바뀌면서 횡성 지역 활동가들과 결합해 다양한 마을교육공동체 프로그램을 꾸려왔다. 2018년부터 3년 동안 청소년주말학교 ‘더(The) 꿈’을 운영했고 안흥면 지역 청소년들과 인문학수업을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청소년 민회’도 열었다. 지역 장애인센터와 연계해 발달장애인에게 농사나 목공을 가르치고 뇌 병변 장애인과 시를 읽는 수업도 해왔다. 올해도 발달장애인 7명이 매주 한 차례 서원을 찾아 텃밭에서 이 이사장과 함께 작물을 키우고 있다.
최근 자신의 삶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한 책 <엄마와의 약속>(논형)을 낸 이 이사장을 지난 21일 서원에서 만났다.
이 이사장은 올해 ‘인생학교 공감’ 교장 직함도 얻었다.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 어른으로 세분화한 4개의 인생학교를 새로 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 인생학교는 조손이나 한부모, 다문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이들 25~30명을 모아 5월과 여름·가을에 2박3일 캠프를 열고, 청소년은 격주로 주말에 만나 ‘나의 시, 나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이 교장이 직접 인문학 수업을 할 계획이다. 청년 인생학교에서는 강사를 초청해 ‘시대 읽기’를 하며 밤새 술잔도 기울일 생각이고, 어른은 강좌 중심으로 꾸릴 참이다. 강원도교육청의 예산 지원도 받았다.
그는 흙집 건축 사업으로 수익이 생길 무렵인 2007년 서원 터를 장만해 6년 동안 건축에 공을 들였다. 현대식 한옥으로 수녀원과 사찰, 교회까지 지어봤다는 그는 서원 활동에 전념하려고 2016년 건축 사업에서 손을 뗐단다.
이 이사장은 애초 서원 건축 때 ‘살림집 목수학교를 통해 마을 활동가를 배출한다’는 계획이었다. “자본에 예속하지 않은 독립된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어요. 저와 목수 6~7명이 한옥 짓는 기술과 농사법을 가르치면 학생들은 각자 마을로 가서 배운 것을 가르친다는 구상이었죠. 하지만 서원을 여니 바로 먹고사는 문제가 걸리더군요. 애초 뜻을 접어야 했죠.”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4학년 때 제적돼 공식 학력이 고졸인 이 이사장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모두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대학 3학년 때인 1984년 민정당사 농성사건으로 구속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86년에는 학생운동 조직 사건에 얽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노동운동을 하던 1989년에는 노동쟁의 조정법 3자개입 금지 조항으로 세 번째 구속을 당했다. 두 번째 구속 때는 수사관 4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학생운동 조직 윗선을 대라’고 구둣발로 무릎을 짓밟아 지금도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단다.
2013년 횡성군 갑천면 한옥흙집 지어
마을교육공동체·인생학교 공감 등
발달장애인 7명과 매주 텃밭 농사도 성대 ‘80년대 운동권’ 세차례 옥살이
“다른 사람 위해 뭔가 할 때 행복”
자전 인터뷰집 ‘엄마와의 약속’ 내 그는 1986년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어머니에게 “평생 정치는 하지 않고 대중운동을 하며 살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책 제목이 ‘엄마와의 약속’인 이유이다. 모친은 한국전쟁 중 방공호에서 수류탄 파편을 맞아 오른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했고 1982년 갑자기 쓰러져 전신불수 상태에서 10년을 지내다 별세했다. 이 이사장이 86년과 89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것도 어머니 ‘덕’이었단다. “아버지께서 선고 재판 전에 어머니를 업고 면회를 왔었죠. 아픈 어머니를 앞세워 아들 형량을 낮추겠다는 심산이었는데 효과가 있었죠.” 평북 정주에서 나 해방 이후 월남한 그의 부친은 한국전쟁 뒤 용인 신갈 지역에 정착해 안식일 교회를 세웠고 이어 전쟁고아를 가르치는 학교(배성중)도 세워 17회 졸업생까지 배출했다. 학교 터가 경부고속도로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단다. 그가 ‘신의주 할머니’로 부르는 외조모는 출석하던 교회가 지역 토호의 전횡으로 문제가 생기자, 사재를 털어 새 교회 개척을 적극 도왔단다. 이 이사장은 고교 시절부터 외조모가 다니던 기독교장로회 교회에서 청년운동과 야학 교사 활동을 했다.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도 1988년 부친의 건물 내 한 점포에 사회과학 서점을 열고 대학생들과 독서회를 시작하면서였다. 그는 책에서 86년 수배 중에도 매주 한 차례 집의 담을 넘어 어머니 이를 닦아드렸다고 썼다. “이를 닦으려면 뒤에서 엄마 몸을 지탱해야 하는 데 작은 누이 혼자로는 힘들었어요.” 그는 자신이 지금껏 사회운동을 해온 기본 배경이 엄마라고도 했다. “자라면서 늘 엄마가 온전히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엄마가 바로 전쟁·분단·민중·사회적 약자이셨죠. 아버지도 제가 하는 일을 한 번도 막아서지 않았어요. 자랑스럽게 생각했죠.”
왜 ‘마을공동체 운동’이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절차적 민주화가 되었다지만 불평등, 불공정 구조는 변화가 없어요. 평화의 가치도 구현되지 않았고요. 새로운 권력이 바로 기득권이 되어서죠. 민중은 또 다시 이용만 당했죠. 우리가 꿈꾸는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죠. 그래서 저는 ‘무형의 마을공동체’라는 표현을 씁니다. 서원은 중심이 아니라 인큐베이팅(알품기) 구실을 하고 싶어요.” 그는 마을공동체 운동에서 우선 아이와 청소년, 어른들이 각각 모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청소년들도 서로 어울려야 재밌잖아요. 여기는 피시방이나 노래방도 없어요. 같이 모여 먹기도 하고 텃밭도 가꾸고 구석방에 누워 만화책도 보면서 놀아야죠. 요즘은 농촌에 기계가 들어오면서 농민들도 개별화하고 있어요. 어른들이 모여 술 한잔 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필요해요.”
인터뷰 끝에 왜 이렇게 사는지 물었다. “인간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할 때 더 행복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엄마와의 약속> 표지.

이동일 이사장이 장애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은 행인서원 안 작은도서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마을교육공동체·인생학교 공감 등
발달장애인 7명과 매주 텃밭 농사도 성대 ‘80년대 운동권’ 세차례 옥살이
“다른 사람 위해 뭔가 할 때 행복”
자전 인터뷰집 ‘엄마와의 약속’ 내 그는 1986년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어머니에게 “평생 정치는 하지 않고 대중운동을 하며 살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책 제목이 ‘엄마와의 약속’인 이유이다. 모친은 한국전쟁 중 방공호에서 수류탄 파편을 맞아 오른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했고 1982년 갑자기 쓰러져 전신불수 상태에서 10년을 지내다 별세했다. 이 이사장이 86년과 89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것도 어머니 ‘덕’이었단다. “아버지께서 선고 재판 전에 어머니를 업고 면회를 왔었죠. 아픈 어머니를 앞세워 아들 형량을 낮추겠다는 심산이었는데 효과가 있었죠.” 평북 정주에서 나 해방 이후 월남한 그의 부친은 한국전쟁 뒤 용인 신갈 지역에 정착해 안식일 교회를 세웠고 이어 전쟁고아를 가르치는 학교(배성중)도 세워 17회 졸업생까지 배출했다. 학교 터가 경부고속도로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단다. 그가 ‘신의주 할머니’로 부르는 외조모는 출석하던 교회가 지역 토호의 전횡으로 문제가 생기자, 사재를 털어 새 교회 개척을 적극 도왔단다. 이 이사장은 고교 시절부터 외조모가 다니던 기독교장로회 교회에서 청년운동과 야학 교사 활동을 했다.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도 1988년 부친의 건물 내 한 점포에 사회과학 서점을 열고 대학생들과 독서회를 시작하면서였다. 그는 책에서 86년 수배 중에도 매주 한 차례 집의 담을 넘어 어머니 이를 닦아드렸다고 썼다. “이를 닦으려면 뒤에서 엄마 몸을 지탱해야 하는 데 작은 누이 혼자로는 힘들었어요.” 그는 자신이 지금껏 사회운동을 해온 기본 배경이 엄마라고도 했다. “자라면서 늘 엄마가 온전히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엄마가 바로 전쟁·분단·민중·사회적 약자이셨죠. 아버지도 제가 하는 일을 한 번도 막아서지 않았어요. 자랑스럽게 생각했죠.”

이동일 이사장(뒷줄 왼쪽 두번째)의 소년 시절 가족 사진. 앞줄 왼쪽부터 외조모와 모친이며 뒷줄 오른쪽이 부친이다. 이동일 이사장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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