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르테미시아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
메리 D. 개러드 지음, 박찬원 옮김 l 아트북스 l 2만2000원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디트와 하녀>. 캔버스에 유채, 1618~19년경, 피티궁 팔라티나미술관, 피렌체. 아트북스 제공
H. W. 젠슨이 쓴 800 여 쪽에 이르는 < 서양미술사 > 에서 여성 미술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500 쪽 즈음이라고 한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593~1656) 다 .
< 여기 , 아르테미시아 > 는 그 여성화가를 아비한테 물려받은 성 젠틸레스키를 떼고 ‘ 아르테미시아 ’ 로 부른다 . 게다가 그 화가의 묘비명인 ‘ 여기 , 아르테미시아 ’ 를 제목으로 삼았다 . 당대에 이름만으로 통했다는 방증인데 ,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있냐는 거다 .
지은이 메리 D. 개러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미술 전문가다 . 자타 공인 아르테미시아 연구자 . 30 여 년 전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에서 영웅의 이미지 > 를 저술한 바 있다 . 이번 책은 아르테미시아가 살아낸 시대와 그의 작품을 훑어 내리면서 그가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임을 증거한다 . 그에게 붙여진 ‘ 프로토 ( 원시 ) 페미니즘 화가 ’ 호칭에서 ‘ 프로토 ’ 를 떼어버렸다 . 이름에서 성을 떼어 버린 것처럼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캔버스에 유채, 1618~20년경, 우피치미술관, 피렌체. 아트북스 제공
아르테미시아 하면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1618~20 경 ,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 를 가장 먼저 떠올릴 거다 . 두 여인이 침상에 누운 남성의 목을 따는 장면인데 , 푸주한이 돼지 잡는 걸 연상시킬 정도로 나이브해 사뭇 위악적인 느낌조차 든다 . 금세 잘린 듯 경동맥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 검과 머리통을 움켜쥔 유디트의 팔뚝과 어깨가 기형적으로 굵다 . 아르테미시아가 사사한 카라바조를 비롯한 다른 남성 작가들의 동일소재 작품과 엄청 다르다 .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 유디트 ’ 는 두 개가 더 있다 . 피렌체 피티궁 팔라티나미술관 소장 < 유디트와 하녀 >(1618~19 경 ) 와 미국 디트로이트미술관 소장 < 유디트와 하녀 >. 세 작품을 비교하면서 천천히 들여다보면 책의 저자가 공들여 서술하고 있는 아르테미시아와 그의 시대가 풍속화처럼 확연하게 떠오른다 .
우선 , 유디트 연작을 그린 이유 . 고향 로마에서 화가 아비의 도제로 일하던 17 살 때 성폭행 당한 일과 관련된다 . 아비의 친구화가가 원근법을 가르쳐 준다며 접근해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 . 이 일로 아르테미시아는 법정에서 처녀성과 피해자임을 진술하고 그 진술에 거짓 없음을 입증하는 고문을 당하는 등 심각한 2 차 피해를 당한다 . 목이 잘리는 홀로페르네스는 아비의 친구 혹은 남성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디트와 하녀>. 캔버스에 유채, 1625~27년, 디트로이트미술관, 미국. 아트북스 제공
연작에는 두 여성 , 즉 유디트와 하녀가 등장하는데 , 두 사람은 아주 밀접한 협업관계다 . < … 목을 치는 유디트 > 에서 몸을 누르고 , 목을 따고 , < 유디트와 하녀 > 에서는 거사 뒤 탈출로를 살피고 , 따낸 목을 싸거나 바구니에 넣어 들고 있다 . 특히 팔라티나미술관 본은 유디트가 하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감싸고 있는 점이 두드러지고 , 디트로이트미술관 본은 촛불과 뒤쪽 휘장 등의 보조물이 있어 극중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 지은이는 시대상의 반영이라고 본다 .
이 그림을 그릴 당시 , 화가는 약제사와 결혼해 피렌체로 이주해 있었다 . 다섯 아이를 낳았지만 (4 명은 5 살 전에 사망 ), 엄마보다 화가로서 경력을 추구했다 . 인맥을 넓혀나간 끝에 피티궁의 메디치 집안 및 카사 부오나로티의 미켈란젤로 증손자 집안과 연결되었으며 남성 아카데미의 첫 여성회원이 되었다 .
피렌체 메디치 집안은 문학 , 미술 등 예술인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했다 . 당시 코시모 2 세 대공은 건강이 안 좋아 그의 어머니 크리스틴 데 로렌과 대공비 마리아 마달레나가 문화활동을 관장했다 . 크리스틴의 모계 쪽 할머니는 프랑스 태후 카트린 데 메디치였고 , 마리아 마달레나는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 1 세의 손녀였다 . ‘ 여성 정치 세계 ’ 라 부르는 두 여성의 통치기간 동안 피렌체에는 여성공동체가 형성됐다 . 그 덕에 여성을 칭송하는 저술 다섯 편이 출간돼 여성들 사이에서 읽혔고 , 여성들이 참여하는 토론회와 연극공연이 열렸다 . 메디치 집안의 연줄로 화가는 루브르궁과 잉글랜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게 된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막달라 마리아>. 캔버스에 유채, 1617~20년, 피티궁팔라티나미술관, 피렌체. 아트북스 제공
지은이는 작가의 타고난 천재성과 당시 피렌체에 형성된 여성공동체 분위기가 특별한 여성주의 화가를 탄생시켰다고 본다 . 화가는 아비한테 받은 도제수업 외 뚜렷한 사숙관계가 보이지 않지만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 강렬한 명암대비와 소재선택에서 유사하지만 구현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 화가는 상상 속에서 라이벌을 넘어선다 . < 야엘과 시스라 >(1620) 에서 희생자인 남성의 얼굴이 카라바조라는 데 학자들 의견이 일치한다 .
화가는 젊은 귀족과의 염문으로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하는데 , 그 즈음에 남편의 존재는 사라지고 작품에서 페미니즘 성격이 강해진다 . < 야엘과 시스라 >, <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 < 아하수에르 왕 앞의 에스더 > 등 . 여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구매자를 찾지 못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 지은이는 이들 작품에서 왜 그렇게 그려져야 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 젠더 역전의 통쾌함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회화의 알레고리>. 캔버스에 유채, 1638~40년경. 아트북스 제공
아르테미시아와 그를 받쳐준 여성공동체는 여성을 개무시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둘러싸인 섬 같은 존재 . 화가는 ‘ 나는 이래야 한다 ’ 와 ‘ 나는 이러고 싶다 ’ 사이에서 분열된 자의식 속에 살았다고 말한다 .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은 예외적인 인물 , 그 인물들의 이중성 그리고 종종 선택한 알레고리적 표현 역시 이를 웅변한다고 말한다 .
책은 카피레프트를 표방한다 . 책에 포함된 이미지는 얼마든지 복제 유포할 수 있다 . 상업적인 것을 포함해 어떤 목적으로 변형해도 좋다 . 단 , 크레딧을 표기하는 조건으로 .
주세페 체사리 <수산나와 장로들>. 캔버스에 유채, 1607년경 아트북스 제공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수산나와 장로들>. 캔버스에 유채, 서명과 제작연도 1610년, 그라프폰쇤베른컬렉션, 폼메르스펠덴, 독일. 아트북스 제공
임종업 <뉴스토마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