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가 소설집 <저주토끼>의 ‘작가의 말’에 쓴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출판사는 “불의가 만연한 지금 같은 시대에 부당한 일을 당한 약한 사람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내기로 했다는데, 정작 작가의 의도는 이와 전혀 달랐기에 “상당히 놀랐”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저주토끼’를 비롯해 여러 그로테스크한 복수극들을 그리고 있지만, 한결같이 그 끝에는 어떤 후련함보다는 한없이 쓸쓸하고 먹먹한 감정을 남기고 있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응징하는 후련한 복수극보다도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독자들에게 더 절실한 위안이 될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번주에 소개 드린 책 <비밀의 취향>에서 철학자 자크 데리다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에는 어떤 역설이 있는데, 그것은 민주주의가 응답권과 묵비권 모두를 지키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에 응답해야 하는 권리와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정작 현실 속에서 응답하겠다는 사람은 그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응답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은 응답해야 할 책임을 추궁당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정치·사회·경제와 같은 이른바 ‘공적 공간’에 남김없이 환원되지 않을, 어떤 ‘내밀성’의 세계가 꼭 필요하다고 새겨봅니다. 단지 사필귀정, 권선징악에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외롭고 쓸쓸하다’는 이야기로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인 위안을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세계 말입니다.
최원형 책지성팀장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