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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해빙에 갇힌 남극 탐사선…그들은 서서히 미쳐갔다

등록 2022-07-08 05:00수정 2022-07-08 10:23

1897년 남극 탐사선 ‘벨지카’호 기록
아문센, 쿡 등 야심 찬 다국적 대원들

혹독한 자연, 괴혈병 등 극한 상황
수기, 항해일지 등 동원해 복원

미쳐버린 배
지구 끝의 남극 탐험
줄리언 생크턴 지음, 최지수 옮김 l 글항아리 l 2만2000원

한 줄로 줄이면 125년 전 벨기에 국적 ‘벨지카’호의 남극 탐험 여정기.

증기기관을 갖춘 범선 벨지카호는 1897년 8월16일 19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안트베르펜항을 떠났다. 이 배는 리우데자네이루, 푼타아레나스 찍고 남미대륙과 남극대륙이 덩굴손처럼 뻗어 있는 드레이크 항로를 거쳐 남극권에 도착했다. 브랜스필드 해협, 제를라슈 해협을 지나며 대륙과 바다에서 탐험 활동을 한 배는 벨링스하우젠해를 돌아 남미대륙을 거쳐 역순으로 1899년 11월5일 귀향했다. 당시 세계지도에서 남극대륙은 텅 빈 상태. 이들이 전인미답의 지경에서 얻은 탐사 기록으로써 지도 빈칸은 물론 극지 생태계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라고 정리했다면 밍밍할 터.

지은이는 잡지 <디파처스>의 선임편집자 줄리언 생크턴. 어쩌다 마주친 <뉴요커> ‘화성으로’라는 기사. 화성과 환경이 비슷한 하와이 마우나로아에서 6명의 지원자가 고립 생활을 한다는 내용. 첫 단락에 120여년 전 남극의 겨울을 최초로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오잉?! 게다가 미국에서 가장 낯 두꺼운 사기꾼 축에 드는 의사 프레더릭 앨버트 쿡이 등장인물로 나왔다. 그 인간은 지은이가 매일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며 지나던 뉴욕 라치몬트의 한 집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 헐! 그렇게 책은 임자를 만났다.

5년여 동안 집착해 취재 집필한 책의 제목이 요상하다. ‘지구 끝의 정신병동’으로 해석되는 ‘Madhouse at the End of the Earth’(한국어 번역본은 ‘미쳐버린 배’). 그냥 남극 탐험기가 아니다. 벨지카호는 2년이 넘는 남극 여정 가운데 절반, 즉 1898년 3월5일부터 1899년 3월14일까지 1년을 해빙에 갇혀 옴쭉달싹 못 했다. 책도 딱 절반이 그 얘기다. 배는 바다나 강물 위를 다녀야 하는 법. 멀쩡한 배, 멀쩡한 선원들이 1년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좁은 배 안에서 생활한다고 상상해 보라. 탈출을 기약할 수 없는, 어쩌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미춰’버리지 않겠나.

1898년 해빙에 갇힌 벨지카호와 선원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1898년 해빙에 갇힌 벨지카호와 선원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특이형 가옥으로 변한 배 외에 혹독한 자연이 배경. 남극 연평균기온은 –23℃. 지금까지 관측된 최저기온은 –88.3℃. 지구상에서 가장 춥다. 연평균 강수량은 50~70㎜로 사막 수준이다. 바람은 무척 강하게 분다. 해안에서 심한데, 커먼웰스만의 연평균 풍속은 초속 22.2m에 이른다. 해가 뜨지 않는 흑야, 해가 지지 않는 백야가 존재한다. 대체로 밤과 낮이 6개월씩 반복된다. 참고로 남극은 한국의 계절과 정반대여서 7~8월이 겨울이며 가장 껌껌하다.

등장인물은 명예를 존중하는 귀족 출신의 사령관 아드리엥 드 제를라슈, 남극 탐험에 뜻을 세워 계획을 수립하고, 기금 및 인원 모집한 총 책임자다. 천체 항해 전문가인 해군 중위 출신 선장 조르주 르콩드. 내성적인 사령관에 비해 인간관계가 원만하여 선원들을 통솔한다. 폴란드 출신 화학자이자 지질학자 헨리크 아르츠토프스키, 그의 친구 과학자 안토니 도브로볼스키, 동물학자 에밀 라코비차. 이들의 업무는 과학 탐사 및 채집. 노르웨이 출신의 일등항해사 로알 아문센, 미국인 의사 프레더릭 앨버트 쿡. 두 사람은 극지 탐험에 뜻을 두고 무급으로 자원했다. 그밖에 말썽쟁이 엔진 정비공 앙리 소머즈, 뒤비비에, 사령관의 단짝 친구인 포병 중위 에밀 단코, 그리고 일반 선원들. 모두 19명으로 벨기에, 노르웨이, 폴란드, 미국 등 다국적 부대다.

가장 큰 목표는 위도 75도 부근의 남자극점에 도달하기. 이를 정확하게 확인하면 진남과 자남의 차이를 분명히 할 수 있어 항해술에 획기적인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일정의 지연으로 계획이 틀어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를라슈는 빈손으로 철수하느니 그곳에서 겨울을 날 셈으로 선원들의 뜻을 묻지 않고 배를 해빙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선원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 사령관과 선원들 사이는 나빠지고, 권위는 서서히 떨어져 나중에는 직접 대화를 않고 편지를 주고받는 식으로 변한다.

남극 지방을 탐사하는 벨지카호의 모습. 글항아리 제공
남극 지방을 탐사하는 벨지카호의 모습. 글항아리 제공

벨지카호를 이끈 벨기에 해군 출신의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의 모습. 글항아리 제공
벨지카호를 이끈 벨기에 해군 출신의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의 모습. 글항아리 제공

공간이 한정된 배와 극지 해빙 위는 출구 없는 천연 감옥. 식량은 대부분 흐물흐물한 통조림. 게다가 6개월이라는 기나긴 밤. 정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씹을 거리’가 없는 이들은 괴혈병과 함께 서서히 미쳐갔다. 불규칙한 심장박동, 피로, 적개심, 우울증, 기억력 저하, 인지적 지연 등. 텅 빈 눈으로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해리성 둔주 상태, 일명 ‘남극의 응시’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지은이는 등장인물들의 비정상 행태와 그들 사이의 역학 변화를 촘촘히 기록한다. 뱃일이 없어지면서 구성원들의 원래 지위와 역할이 무의미해지고 그 자리를 인간성과 현실 적응력이 메운다. 취업 단기 목적을 가진 유급자와 자기만의 장기 목표를 가지고 무급으로 자원한 자의 차이가 도드라진다.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아문센과 쿡. 이들은 자폐적인 다른 이들과 달리 ‘펭귄기사단’을 자처하여 똥과 쓰레기가 뒤엉켜 만들어진 빙벽을 넘어 해빙을 탐사한다. 이때 터득한 경험지식은 아문센이 위대한 탐험가로 우뚝 서는 밑천이 된다. 낙천적인 쿡의 호기심은 펭귄과 물범 날고기를 먹임으로써 선원들을 괴혈병에서 건져내고 해빙을 톱으로 잘라내 출로를 찾아가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지은이는 구성원들이 남긴 10여종의 수기를 종합하고, 제를라슈 증손자의 집, 노르웨이 국립도서관, 스콧 극지연구소, 왕립 벨기에 자연과학협회 등을 방문해 입수한 당시 항해일지, 탐사 자료 등 원자료를 녹여 넣어 벨지카호와 탑승자들의 행적을 유려하게 복원했다. 아무래도 같은 미국인인 쿡에 빙의한 느낌이 강하다. 출발지 안트베르펜항과 도착지 남극을 직접 답사해 현장감을 추가했다. 벨지카호가 고독과 절망에 몸을 떨었던 곳에 마티니와 노래가 넘치는 크루즈가 다니고 빙하가 녹아내려 바닷물이 묽어지며 생태계가 변하는 현실도 전한다.

임종업 <뉴스토마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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