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l 한길사 l 3만5000원
“우크라이나는 고대 러시아 땅으로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 현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더 정확히는 볼셰비키 공산주의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졌다. 볼셰비키 정책의 결과 오늘날, 레닌의 우크라이나라고 부를 수 있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등장했다. 우크라이나에는 진정한 국가의 전통이 없다.”
지난 2월21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이를 정당화하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놓은 연설문 내용 중 일부다. 우크라이나는 레닌이 만들었을 뿐 나라의 전통이 없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런가? 현격한 군사력의 차이로 불과 며칠 버티지 못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맞서 5개월째 항전을 계속하고 있다. 국가의식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르히 플로히 미국 하버드대 우크라이나연구소장이 지은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는 푸틴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읽힌다. (물론 그 전에 초판이 출간됐다.) 책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강대국이 벌이는 세력다툼 속에서 오랜, 그리고 고통스런 투쟁을 거쳐 국민, 영토를 갖춘 주권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은이는 600여 쪽에 걸쳐 우크라이나 강역의 2000년 역사를 훑어 내리는데, 1부에서는 전사에 해당하는 1000년, 2~5부에서 우크라이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1000년을 다룬다.
코자크 결혼(요제프 브란트, 1895년경). 코자크는 경비병, 자유인, 약탈자를 의미한다. 작은 무리를 이뤄 정착지와 유목민 야영지 밖의 스텝 지역에 거주하며 수렵과 사냥, 약탈로 생계를 유지했다. 한길사 제공
우크라이나인들은 스스로 “자연은 축복받았지만 역사는 저주받았다”고 말한다. 축복이란 흑해로 흘러드는 드니프로강과 드니스트르강 유역의 흑토지대에 자리 잡아 ‘유럽 빵바구니’ 구실을 하는 것을 말하고, 저주란 이로 말미암아 강대국의 침략과 지배를 감내해야 했던 지난한 역사를 말한다.
이러한 운명은 우크라이나 민요인 ‘두마’에 화석으로 박혔고 소설, 티브이(TV) 드라마로 부단히 재현되고 있다. 코자크가 대표적이다. 15, 16세기 오스만제국은 비이슬람 교도 노예사냥을 위해 우크라이나로 시선을 돌렸다. 오스만 가신국인 타타르족의 크림 칸국, 우크라이나 남부를 지배한 기라이 왕조가 이에 호응하여 크림반도에 노예시장이 형성됐다. 이곳에서 두 세기에 걸쳐 거래된 노예가 150만~300만명. 코자크는 정착지 밖에 거주하며 사냥, 약탈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들은 큰 세력을 형성해 크림반도의 노예무역 중심지인 카파를 공격해 모든 노예를 해방시켰으며, 모스크바공국의 왕위 계승에 간여하기도 했다.
국가 태동은 1648년 시작된 폴란드 지배에 항거해 일어난 코자크 대반란에서 비롯한다. 반군 지도자는 당시 53살 흐멜니츠키(1596~1657). 영지를 빼앗긴 데 분노한 그는 타타르 기병대와 연합해 1만 군사를 지휘하여 폴란드 상비군을 궤멸시킨다. 그는 키이우에 입성하여 시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며 폴란드 노예제도에서 우크라이나를 구원한 모세라는 평가를 받았다. 흐멜니츠키는 코자크의 권리보호 차원을 넘어 민족의 지도자로 올라서며 ‘공국’이나 국가를 세우기에 이른다. 이듬해 폴란드 왕 얀 카시미르 2세와 코자크 국가설립에 관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키이우, 브라트슬라우, 체르니히우 주 등 3개를 아우르는 ‘헤트만령’이 그것. 5년 단명에 그쳤지만 군대와 같은 사회조직, 오스만제국의 군사, 행정 모델을 모방한 행정체계를 도입했다. 그는 5흐리벤(우크라이나 화폐) 지폐 모델로 전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다.
키이우에 입성하는 흐멜니츠키(미콜라 이바슈크, 1912). 1648년 12월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키이우로 개선한 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공후라 칭하며 축복했다. 한길사 제공
타라스 셰브첸코 초상(이반 크람스코이, 1871). 셰브첸코는 우크라이나어로 창작활동을 함으로써 국민의식을 고취시켰다. 농노 출신인 그는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이가 거금을 들여 자유인으로 만들었다. 한길사 제공
문화 공동체로서 국가 정립은 타라스 셰브첸코(1814~1861)를 시초로 꼽는다. 1814년 농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지주 집안의 급사로 일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지인들의 도움으로 24살에 자유인이 됐다. 시인으로도 이름을 떨치는데, 우크라이나어 창작이 금기시되던 시대에 첫 시집 <유랑시인>에 자국어 창작 시를 수록했다. 그는 개정판(1847년) 서문에 “나는 러시아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글을 쓰게 하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쓰면 된다. 그들은 언어를 가진 민족이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사람들이 판단하게 하자”고 썼다. 그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비밀결사에 간여한 사실이 발각돼 10년 사병노역형을 받았다.
역사가 미하일로 흐루솁스키. 우크라이나 혁명기 의회인 중앙 라다(1917~18) 의장을 지냈으며, <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전10권)을 저술해 우크라이나 역사를 독자적인 연구 분야로 확립했다. 한길사 제공
우크라이나가 정부체제를 갖춘 것은 1917년 혁명정부인 ‘집정내각’. 러시아 2월혁명으로 로마노프 왕가가 종말을 고하자 3월에 우크라이나 정치, 문화조직 지도자들은 혁명기 의회인 ‘중앙 라다’를 구성했다. 역사가인 미하일로 흐루솁스키(1866~1934)는 의장을 맡아 우크라이나의 영토적 자치가 당면한 군사, 경제, 사회 문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했다. 페트로그라드 임시정부로부터 ‘집정내각’을 지방정부로 인정받았다. 10월 볼셰비키 쿠데타에 대응하여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중앙 라다가 1918년에 발표한 네 번째 우니베르살(포고령) 왈, “우리는 모든 이웃국가들, 즉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튀르키예, 기타 국가들과 평화와 우호 속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국가들 중 어느 나라도 독립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생활에 간섭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우크라이나가 푸틴의 만행을 극복하리라 믿는 것은 2013~2014년 ‘마이단 혁명’ 때문. 유럽연합과의 협력협정 체결을 거부한 야누코비치 정권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일어섰다. 한겨울 혹한을 동지애로 견디고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죽기살기로 항거한 결과 독재자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임종업 <뉴스토마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