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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치료는 의사의 대처가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등록 2022-08-26 05:00수정 2022-08-26 13:57

정신과 의사 아서 클라인먼
고통 겪는 만성질환자 심층 인터뷰
마음과 몸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
‘생물학적 치료만 효과’ 위험성 짚어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가 들려주는 온몸으로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우리의 질병과 그 의미에 대하여

아서 클라인먼 지음, 이애리 옮김 l 사이 l 2만4000원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에서 저자 아서 클라인먼은 질병의 ‘생물학적’ 측면만이 진짜이고 생물학적 치료만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반복해 강조한다.  공동취재사진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에서 저자 아서 클라인먼은 질병의 ‘생물학적’ 측면만이 진짜이고 생물학적 치료만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반복해 강조한다. 공동취재사진
“만성질환자들은 대개 국경 지역에 갇힌 사람들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지역을 방황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많은 이에게 만성질환은 국경을 넘는 위험이자 평범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끝없는 기다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만성질환자는 증상이 나빠졌다 괜찮아졌다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하는데, 의사는 질병의 만성화를 가능한 한 직접 관찰한 질병과 환자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가 펼치는 주장이다.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는 만성질환의 원인부터 치료 과정까지를 (생물의학적 관점을 보완하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책이다. 여기에는 ‘신체화(somatization)’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신체화는 생물의학적 원인이 없는데도 개인적이고 인간관계에 관련된 ‘심리적 문제’가 신체적 고통이나 내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신체화는 한마디로 환자의 경험이 생리학적 측면으로 연장되는 현상이다.” 각종 검사를 해도 문제가 없다고 나오지만 환자는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 또는 삶의 문제에 대한 무의식적 표현의 일환으로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 말이다.

이 책은 그러므로 고통을 읽는 법을 다룬다. 의료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몸이 고통을 겪는 원인을 알아낼 수 있지만, 의사는 환자의 말을 통해서 그가 겪는 질병 경험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듯 들리는 말이지만 심리적 돌봄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은 책이 처음 출간된 1980년대 후반이나 지금이나 잘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아서 클라인먼은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의학, 의료인류학, 사회의학 분야 연구자다. 수많은 생물의학적 치료에도 호전되지 않는 환자들을 만나면서 한 사람의 삶과 질병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뤘다. 저자는 그 자신이 평생 천식을 앓았으며 50대 후반에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10여년 간 직접 간병했다. 또 중국과 대만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문화권에 따라 어떤 사회적 요인이 환자들의 심리와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지도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는 실제 환자들의 사례를 나누면서 마음과 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논한다. 치료에 성공한 성공 사례 모음이 아니라는 점은 먼저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한때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하워드 해리스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고 경찰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시작된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큰 척추 수술을 네 번이나 받았는데도 통증에서 도통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통증에 매몰된 삶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거나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역량을 키우는 등의 일을 할 수 없었는데, 그 결과 허리 통증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는 자신의 통증이 심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이 책에 따르면 “만성 통증을 앓는 거의 모든 환자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한가지는 바로 어느 시점에 이르면 주변인들(주로 의사를 말하지만 때로는 가족들도 포함된다)이 환자의 통증 경험이 진짜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하워드의 경우는 통증이 심해지는 시기를 관찰하면 일터와 가정에서 ‘소통과 협상’에 직면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에서 저자 아서 클라인먼은 질병의 ‘생물학적’ 측면만이 진짜이고 생물학적 치료만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반복해 강조한다.  지역 어르신 위한 무료 의료봉사에서 의사가 노인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아산병원 제공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에서 저자 아서 클라인먼은 질병의 ‘생물학적’ 측면만이 진짜이고 생물학적 치료만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반복해 강조한다. 지역 어르신 위한 무료 의료봉사에서 의사가 노인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아산병원 제공
중국 후난성 지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40살의 교사인 옌광젠은 깊은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만성 신경쇠약과 두통, 피로를 호소했다. 그의 고통에는 몇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 활동적이었던 그는 공산당과 관련한 일을 하며 고등교육을 받기를 꿈꿨다. 그런데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가난한 농촌 지역으로 떠나는 하방 대상이 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문직에 종사해온 지식인 집안의 딸이었다가 중국에서 사회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단절되자 그는 냉담하고 고독해졌다. 승진 기회를 거부했고 지역 토박이 남자와 결혼했으며, 부부는 세 아이를 낳았지만 떨어져 지낸다. 딸이 우수한 성적에도 장애 때문에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를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그의 두통과 만성피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개인이 겪는 병리적 현상은 유전적 성향이나 가족 상황, 개인의 발달 과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지역 사회의 환경은 취약 계층 사람들에게 강력한 사회적 영향을 미친다.

39살의 멜리사 플라워스는 흑인 여성으로 어머니, 네 명의 자녀, 두 명의 손자와 함께 도심 빈민가에 거주하며 고혈압을 앓고 있다. 이 사례는 환자가 말하는 자신의 삶과 의사 면담, 진료 차트 기록을 연이어 보여주는데, 뒤로 가면서 “사회 시스템의 붕괴, 폭력, 부족한 자원과 더불어 미국에 사는 흑인 하층민의 제한된 삶의 기회”라는 요인은 사라지고 만다. 사회적 취약 계층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동원할 수 있는 사회적 지지가 부족하며, 거의 모든 종류의 질병과 죽음이라는 위협을 마주할 확률이 더 높다.

만성질환 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주로 걱정하는 부분과 의사가 주로 우려하는 부분이 충돌하기도 한다. 환자는 개인 문제, 일 문제, 가족 문제가 만성 질환의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의사를 찾아가지만 의사는 그런 의견을 무시하고 엄격하게 신체 증상에 집중한 문진과 검사 결과만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병이 없는데도 병에 걸렸다고 믿는 사람들, 질병으로 인한 수치심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사례와 더불어 극심한 고통이나 임박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상반된 자세 등이 언급된다.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의 사례도 8명과 인터뷰를 해 ‘치유자들’이라는 장에 담았다. 이 책은 때로 만성 질환에 대응하기 위해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직접 손봐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도 알게 한다.

아서 클라인먼은 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의사들의 이분법적 사고, 즉 질병의 ‘생물학적’ 측면만이 진짜이고 생물학적 치료만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반복해 강조한다. “치료는 의사의 대처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질병에 대한 환자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이 책이 다루는 이야기를 한국 사례 중심으로 접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김승섭 박사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권한다.

이다혜/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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