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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발 없는 식물은 어떻게 세계를 횡단했나

등록 2022-09-02 05:00수정 2022-09-02 10:20

식물 운반 유리 상자 ‘워디언 케이스’
의사이자 식물애호가가 발명·보급
플랜테이션 등 제국주의 확장욕 자극
침입종, 환경 문제 일으키며 잊혀져
1899년 마다가스카르 현지인인 메리나인들이 워디언 케이스에 담긴 식물을 나니사나 식물 시험소에서 마다가스카르 교외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옮기는 장면. 에밀 프뤼돔 사진. 푸른숲 제공
1899년 마다가스카르 현지인인 메리나인들이 워디언 케이스에 담긴 식물을 나니사나 식물 시험소에서 마다가스카르 교외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옮기는 장면. 에밀 프뤼돔 사진. 푸른숲 제공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 상자
수많은 식물과 인간의 열망을 싣고 세계를 횡단한 워디언 케이스 이야기
루크 키오 지음, 정지호 옮김 l 푸른숲 l 2만5000원

“환경에 대한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대체로 물류에 대한 관점은 빠져 있다.” 루크 키오의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 상자>는 대륙 간 ‘식물의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워디언 케이스의 역사를 다룬다. 큐레이터이자 역사가인 루크 키오는 전시회를 준비하다가 워디언 케이스를 발견하고 그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됐다. 식물이 살아 있는 상태로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있게 만든 발명품이 주목받지 못한 데 관심을 가진 그는 전세계에 퍼진 워디언 케이스와 관련된 자료를 살펴 책을 완성했다. 식물을 운반한 상자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현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식물의 세계적인 이동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마시고 먹고 냄새 맡고 입는 우리의 선택이 식물의 이동으로 변혁을 맞이했다. 이 모든 변화를 목격한 물건이 바로 워디언 케이스였다.

워디언 케이스는 밀폐된 유리 상자다. 충분한 햇빛이 있다면, 식물을 이 상자에 넣은 채로 몇 개월까지도 살아 있는 상태로 운반할 수 있었다. 축축한 흙에 든 식물이 유리를 끼운 밀폐형 상자 안에서 빛을 받는다면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여러 달, 심지어 여러 해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사람은 바로 영국의 외과의사이자 식물 애호가, 박물학자인 너새니얼 백쇼 워드. 1829년, 나방 부화를 관찰하기 위해 밀폐된 유리병에 흙, 마른 잎, 나방의 번데기 등을 넣고 관찰하던 그는 유리 용기 속 고사리와 이끼가 물을 주지 않아도 오래 살아 있음을 관찰하고 식물을 운반하는 밀폐 용기를 만들어 실험을 시작했다. 작동 원리는 온실과 유사하지만, 온실과 달리 이 상자는 크기가 작아 운반할 수 있으며 관리에 신경 쓸 필요가 거의 없다는 압도적인 장점이 있었다.

워디언 케이스가 발명되기 전, 타지의 식물을 가져와 재배하려면 종자를 가져와야 했다. 한국에서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 온 이야기가 전해지듯이. 그러나 많은 식물의 종자는 수분이 말라버리면 죽었고, 특히 기름이 많거나 열대지방에서 나온 종자일 경우 습한 곳에 보관하면 곰팡이가 피었다. 이제 유리 상자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무엇이든 식물을 운반할 수 있게 되자 제국주의적 욕망이 이에 부응했다. “식물을 운반하려는 욕망에는 항상 제국의 세계적 확장과 경제적 이득이라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항구 다섯곳이 영국과의 교역을 위해 개방되었고,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전쟁 이후 중국과의 무력 개방을 통해 외국인들은 훨씬 자유롭게 교역을 시작했다. 영국 왕립 원예학회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식물 채집가를 중국으로 보냈다. 거의 3년간의 여정 끝에 그는 워디언 케이스 18개를 배에 싣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이 여행의 수확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중국의 차 생산 과정이었다. 차를 식민지에서 재배해 중국의 차 독점을 피하고자 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다. 차나무 묘목을 새로운 플랜테이션 지역으로 옮기는 데 워디언 케이스가 역할을 했다.

제국이 팽창하면서 말라리아 예방책으로 쓰인 기나나무의 중요성도 커졌다. 열대 지역을 여행하는 탐험가와 말라리아 유행 지역에서 근무하는 군인, 무역상, 정부 관리는 기나나무 몸통의 껍질 가루에서 채취한 퀴닌을 섭취하게 되어 있었다. 기나나무 원산지는 남미 지역이었지만 영국 및 네덜란드 정부는 기나나무를 자국 식민지의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생물학 첩보전이었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영국이 식민지에서 차 재배에 열중했다면, 네덜란드는 1930년경이 되면 퀴닌 시장의 거의 90%를 점유했다.

1909년 식민지 시험용 식물원의 정원사들이 워디언 케이스 운반을 준비하고 있다. 푸른숲 제공
1909년 식민지 시험용 식물원의 정원사들이 워디언 케이스 운반을 준비하고 있다. 푸른숲 제공

문제는, 살아 있는 식물을 운반하는 것이 생태계를 운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데 있다. “워디언 케이스 내부는 식물, 토양, 물, 외부에서 들어온 햇빛이 모인 미세 생태계였고, 여기에 증산 작용이 더해지면서 우리가 사는 거대한 외부 세계와 비슷하게 작용했다.” 오늘날 식물이나 씨앗으로 만든 수공예품 등은 검역 과정에서 엄격하게 다루어지는데, 그런 규정이 없던, 워디언 케이스의 사용이 가장 활발했던 때 식물 질병과 침입종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워디언 케이스는 최종적으로 주로 생물적 방제를 위해, 즉 통제 불가능한 침입종 식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을 먹고사는 곤충을 운반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환경 관리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무차별적인 식물의 국경 이동은 서서히 제한되기 시작했다. 워디언 케이스가 서서히 잊힌 데는 이런 이유가 한몫했을 것이다.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 상자>가 본격적으로 다루는 식물의 이동과 그에 따른 세계인들의 생활 변천사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것은 워디언 케이스가 활용되는 데 인적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너새니얼 백쇼 워드는 비록 아마추어였지만 영향력은 상당했다. 서신을 주고받는 사람 중에는 찰스 다윈, 마이클 패러데이 등 내로라하는 19세기의 박물학자들이 다수 있었다. 그는 직접 다른 대륙으로 가는 배를 타지 않고도 자신의 상자들을 들려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상자를 통해 이동한 것이 단지 물리적 식물만은 아니었다. 대폭 늘어나는 식물을 운반하기 위해 형성된, 인맥을 통한 유통망 역시 식물과 함께 곳곳에 뻗어 나갔다. 워드는 많은 과학자와의 친분으로 생긴 본인의 명성을 소중히 여겼다. 그 친분은 출간 활동을 많이 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맥을 뛰어나게 관리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워디언 케이스는 한 명의 천재가 발명한 단일한 물건이 아니었다. “기술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거듭 증명해 왔듯이, 발명은 절대 ‘아하’ 하는 깨달음의 순간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대신 항상 긴 개선 단계를 거친다.” 워디언 케이스의 여정을 파노라마 관점으로 바라보며, 이 책은 기술 혁신이 (의지를 지닌 이들의 손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기술을 처음 개척한 발명가보다 혁신이 그 수명이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다혜/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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