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영 첫 단편집 <그녀의 나무 핑궈리>
2004년 장편소설 <공허의 1/4>로 제2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 한수영(39)씨가 첫 단편집 <그녀의 나무 핑궈리>(민음사)를 내놓았다.
‘핑궈리’란 연변에 가면 흔히 보게 되는, 사과와 배를 접붙인 과일을 이르는 말이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연변 출신 여자 만자씨. 동배라는 이름의 무능하고 폭력적이며 바람기까지 있는 사내와 결혼해 서울 변두리에서 살고 있다. 밖으로만 나돌며 술 마시고 여자 만나는 데 필요한 동배의 용돈은 만자씨가 하루 종일 미싱을 타는 중노동을 해서 벌어 들인다.
“철커덕, 철커덕. 오늘도 만자 씨의 미싱은 돌아가요. 비가 오고 눈이 오고 핑궈리 나무에 꽃이 피고 져도 만자 씨는 하루종일 미싱을 타요.”
소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개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보편적 윤리감각과 정의감의 소유자인 개는 동배의 횡포에 분노하며 만자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데, 소설의 마지막은 동배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한 만자씨가 날카롭게 간 가위를 들고 동배가 누워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합법적으로 결혼한 만자씨의 처지와는 조금 다르게, <번지점프대에 오르다>에 나오는 ‘오로라’는 필리핀 출신의 외국인노동자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인공 시평과 사랑하는 사이. 고향에서 익숙했던 바다를 보고 싶어하는 오로라가 어느날 단속반에 쫓겨 줄달음질을 친다. “아이 워너 고우 투 씨(바다로 가고 싶어)!”라 외치며. 역시 결말은 열려 있다. 파국과 희망 가운데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텐가.
표제작에서 개의 시선을 동원했던 작가는 <구리 연>에서는 통신용 구리선으로 만들어진 가오리연을 화자로 삼는다. 가오리연을 만든 남자는 전화회선을 신설하거나 증설하는 일을 한다. 어느 날 아내와 어린 아이를 태우고 젖은 국도를 달리던 남자의 트럭이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로 아이를 잃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친다. 아내는 슬픔을 잊고자 병적으로 카지노에 매달리고, 남자는 참다 못해 아내의 목을 졸라 숨을 거두어 준다.
<구리 연>에서 맨홀 속의 남자가 이어 붙이는 통신용 케이블은 그가 세상과 소통하고 화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핸드폰이 점령한 세태를 풍자적으로 그린 <스프링벅>에서도 소통의 도구인 핸드폰은 오히려 오해에서 비롯된 폭력을 낳을 따름이다.
<피뢰침>은 짝사랑의 상대에게 가 닿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다소 괴기스럽지만 아름답게 그린 소설이다. 은행의 파견직 경비원인 남자는 자신을 벼락을 기다리는 피뢰침으로 자리매긴다. “공중에 홀로 서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번개를 기다리고 있는 피뢰침의 숙명이 남자의 가슴을 쳤다.” 그가 창구 직원인 여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는 수단은 여자의 손길이 닿았던 쇠붙이를 자신의 위 속에 담아 두는 것. 클립과 눈썹 손질용 가위, 실핀, 동전, 캔 맥주 꼭지 등 소화되지 않은 쇠붙이들은 엑스레이 촬영에서 모노톤의 동판화를 그려 보인다. “남자는 자신의 몸 안에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무늬를 새기고 싶었다.” 번개를 기다리는 피뢰침의 사랑이란 극단적일 수밖에 없을 터. 소설의 결말에서 남자는 여자의 턱 밑에 총구를 들이댄 강도에게 덤벼들었다가 총에 맞는다. “이제 막, 번개가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작가의 2002년 단편 등단작인 <나비>는 돼지고기를 날로 먹은 후유증으로 머릿속에 벌레가 자라는 엄마와 도벽이 있는 외할머니, 그리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는 초등 4학년 딸 삼대가 펼치는 애정과 증오의 원무(圓舞)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작가의 2002년 단편 등단작인 <나비>는 돼지고기를 날로 먹은 후유증으로 머릿속에 벌레가 자라는 엄마와 도벽이 있는 외할머니, 그리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는 초등 4학년 딸 삼대가 펼치는 애정과 증오의 원무(圓舞)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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