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소설집 <햇빛 찬란한 나날>
재산·섹스 공유하는 ‘본게마인샤프트’의 이상과 좌절
소설의 속내는 기자였던 ‘나’를 거울에 비춘 것
간절히 원하다 ‘혼자’된 샴쌍둥이의 ‘분리불안’ 등
다양한 소재 넘나들며 깊은 사유
소설의 속내는 기자였던 ‘나’를 거울에 비춘 것
간절히 원하다 ‘혼자’된 샴쌍둥이의 ‘분리불안’ 등
다양한 소재 넘나들며 깊은 사유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영화잡지 <씨네21> 편집장을 지낸 조선희씨가 첫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실천문학사)을 묶어 냈다. 조씨는 짧지 않은 기자생활을 접고 전업작가로 나선 이후 2002년에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을 낸 바 있다.
관례처럼 덧붙이는 ‘작가의 말’을 생략한 채 단도직입 조로 작품부터 들이미는 것은 역시 작가 쪽의 자신감의 표현이라 하겠다. 수록된 열한 편의 단편은 소재와 주제가 다양한데다 경험의 폭과 사유의 깊이를 아울러 갖추고 있어 자신감의 근거를 짐작케 한다.
첫 작품 <메리와 헬렌>을 보자. 두 여자가 간식을 먹으면서 텔레비전 쇼프로를 보고 있다. 브라운관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 이런저런 품평을 늘어놓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친구 혹은 자매로 여겨지는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사태가 분명해진다. 두 사람은 엉덩이 아래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샴쌍둥이였던 것. 샴쌍둥이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고통과 좌절, 그리고 혼자 걷거나 원피스를 입어 보고 싶다는 둥의 안타까운 소망이 소개된 뒤 상황은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헬렌의 ‘포기’를 전제로 수술을 결정하는 것. 수술 이후 과연 헬렌은 목숨을 잃게 되고, 둘이서 공유하던 하체는 온전히 메리의 차지가 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라던 대로 원피스를 입고 혼자서 거리를 걷던 메리는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헬렌을 상대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대단해.(…) 어떻게 태어날 때부터 혼자로 태어나서 평생 그렇게 살아갈 수 있지?”
‘열정과 불안’ 넘어 자신감 훨훨
욕망이란 결핍의 산물일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순간도 ‘혼자’이어 본 적이 없던 메리는 혼자이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그의 분신과도 같던 헬렌은 자신의 귀한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메리의 ‘혼자임’을 가능케 해 주었다. 이제 바라던 대로 혼자가 된 메리는 정반대의 결핍과 욕망에 시달린다. 곁에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일종의 ‘분리불안’이라 할 만한 정신상태다. 이 지점에서 샴쌍둥이라는 특이한 소재는 소재‘주의’적 한계에서 벗어나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표제작은 70년대 중반에 서독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곳의 이상주의 공동체 ‘본게마인샤프트’에서 17년을 살았던 여성을 주인공 삼아 이상과 현실의 관계를 천착한다. 재산과 일상생활은 물론 섹스까지도 공유하는 이 공동체의 체험은 주인공 여자에게 성취와 좌절을 아울러 안겨 주었다.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가 결국 이혼하고 귀국한 주인공은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완전한 행복이 없는 것처럼. 완전한 사회가 없는 것처럼” 이제 옛날 같은 본게마인샤프트는 없다고 말하는 주인공. 그런데 소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 주인공을 관찰하고 그의 말을 끌어내는 화자 ‘나’야말로 진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장 민주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내겠다고” 조직을 꾸리고 토론을 벌이던 신생 신문사에서의 ‘나’의 경험이야말로 이 소설을 끌어가는 숨은 중심인 것이다. 본게마인샤프트의 모색과 좌절은 ‘나’의 이 경험을 비추어 볼 거울로서 동원되었던 것. “절정을 한번 체험한 사람은 언제든 다시 그것을 맛볼 수 있다” “이상을 품는 것도 재능이다”와 같은 구절들은 비록 현실적으로는 좌절을 겪게 될지라도 이상을 품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일의 소중함을 웅변하고 있음이다.
‘경험과 사유의 한계’ 자기고백도
“서울의 지붕 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K(케이)의 짧은 견문으로는 알 수도, 가늠할 수도 없었다.”(<서울의 지붕 밑>)
인용된 문장에서 케이는 며칠째 연락이 끊긴 가사도우미, 그러니까 파출부 ‘정자 씨’의 주소지인 산동네의 꼭대기를 찾는다. 산동네를 답파하는 동안 ‘민중’에 대한 이론적 애정과 현실적 혐오 사이에서 비틀거리던 대학 시절을 떠올리고, 한갓 파출부의 신변을 걱정해서 일도 하지 않은 이틀치 일당까지 챙겨 들고 힘든 걸음을 한 자신에게 ‘소시민적으로’ 감동하기도 한다. 인용된 문장, 그리고 그 얼마 뒤에 이어지는 “사라져버린 정자 씨 가족은 K의 상상력 밖에 있다”는 문장은 한 사람의 지식인이자 작가로서의 자의식의 표출로 읽힌다. 작가는 여기서 자신의 경험과 사유의 한계를 솔직히 털어놓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거꾸로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하겠다는 각오와 다짐의 토로이기도 할 터이다.
<김분녀의 일생>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낙태 수술을 앞둔 대학원생 ‘나’가 외할머니 김분녀의 일생을 요약 제시한다. 남존여비의 차별의식이 극심했던 시대를 살면서 할머니 김분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억압을 뚫고 자아를 실현하고자 몸부림친다. 페미니즘이 이름을 얻고 상당한 기반을 구축한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열악한 상황에서 분투한 할머니에게 ‘나’는 ‘당대 최고의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한때 우리 신촌거리에서 만났지>와 <에덴의 건너편>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구한다. <한때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이른 죽음이라는 사태 앞에서 삶과 죽음의 관계를 반추하는 에세이 형식의 작품이다. 기형도의 죽음이 사실대로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허무는 순간 속의 영원을 찬미하고 향유하자는 태도로써 극복된다. 반면 <에덴의 건너편>에서는 두 가족의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것처럼 죽음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극단적으로 갈린다. 신앙과 학문의 힘으로 이웃의 불행을 위무하던 이가 막상 자신의 가족에게 닥친 불행 앞에서는 신앙에도 학문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자살을 택한다는 결말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결코 녹록치 않은 것임을 역설하는 듯하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혜정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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