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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특이한 곳에 자리잡은 건물들이 말해주는 이야기

등록 2022-10-07 05:00수정 2022-10-07 11:44

건축가 신민재 독특한 프로젝트
도시화·산업화 그림자와 상처

조각난 땅에도 나름의 쓰임새
“사람들의 욕망·탐욕만이 잘못”
서울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그림자 구실을 담당했던 수색동에 위치한 건물의 모습. 집 제공
서울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그림자 구실을 담당했던 수색동에 위치한 건물의 모습. 집 제공

땅은 잘못 없다
신민재 건축가의 얇은 집 탐사
신민재 지음 l 집 l 2만2000원

건축가 신민재의 <땅은 잘못 없다>는 “건축 설계자로서의 시선”으로 시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도시의 정체성, 즉 땅과 건물을 중심으로 우리 삶의 자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고찰한 책이다. 특히 저자는 “특이한 조건의 땅에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는 건축물”을 두루 답사하면서 “못난 땅이라고 땅을 탓하기보다는 땅이 처한 상황과 조건을 살펴보고 땅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에 집중한다. 저자는 도시 건축의 맹점, 즉 도로가 땅과 건축에 남긴 상처, 택지개발이나 큰 시설의 경계에 남은 땅들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등을 두루 짚어내며, 제목처럼 ‘땅은 잘못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땅은 잘못 없다>의 흥미로운 지점은 한 건물에 집중하면서도, 그 건물을 중심으로 일대가 어떤 변화상을 거쳤는지, 향후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를 포착해낸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밀려든 철거민들, 1960년대 초반 연탄공장이 형성된 이유, 1978년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된 후 열악해진 환경 등 “서울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그림자 역할”을 담당했던 서울 수색동 일대를 “수색동의 모든 길이 지나는” 대림모텔을 통해 풀어낸다. 21세기 들어 수색동 일대도 열악함을 떨쳐내고 있다. 옛 수색역은 없어졌고, 철거 이주민이 희망을 품고 일했던 연탄공장 자리에는 대형 마트가 들어섰다. 악취를 풍기던 난지도의 쓰레기 산은 이제 하늘공원으로 서울시민의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되었다.

시간의 문을 열어주는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옛길. 집 제공
시간의 문을 열어주는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옛길. 집 제공

사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도로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발전했고, 한편으로는 망가졌다. 서촌 한복판을 흐르던 백운동천은 복개되어 길이 되었고, 1978년 4차선으로 확장되었다. 추사로, 자하문길, 다시 지금의 자하문로로 바뀐 것은 2010년이다. 자하(紫霞)는 ‘보랏빛 안개’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부처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자색 광명으로 진리의 세계나 이상향”을 뜻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길이지만, 1978년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던 집들이 철거되었다. 철거된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한쪽이 잘려나간 집들도 있었다.
냉전의 흔적을 스쳐지나간 서울 이태원동 녹사평대로와 남은 조각 용산구 장문로 1가의 모습. 집 제공
냉전의 흔적을 스쳐지나간 서울 이태원동 녹사평대로와 남은 조각 용산구 장문로 1가의 모습. 집 제공

“잘려나간 부분을 어떻게든 추스른 건물 일부”가 지금도 몇 채 남았다. 저자는 그런 형태로 남은 자하문로의 몇몇 건물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하문로는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있지만, 개통 과정에서 서촌의 많은 땅과 집이 잘리거나 철거되었다. 그럼에도 서촌의 땅과 건축물은 스스로 치유하고 어떻게든 살길을 찾고 있다.” 땅은 잘못이 없고, 오로지 사람들의 욕망과 탐욕이 도시의 모습을 낯설게 만들 뿐이다.

서울 용산구 장문로 일대는 냉전의 흔적이 스쳐 지나간 곳이다. 1957년 7월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엔군사령부가 옮겨오면서 이곳 일대는 오랜 시간 냉전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 되었다. 주변 건축물들은 유엔사의 변화는 물론 남산 터널 등의 공사로 인해 형편에 닿는 대로 건축되는 경우가 많았다. 큰 시설의 경계에 남은 땅은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독특한 쓰임새가 있다는 의도 아래 협소주택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이 외에도 서울 곳곳의 땅과 건축물 20여 곳을, 저자는 발품을 팔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땅은 잘못 없다>는 무심코 지나치는 땅, 아니 누군가는 사고팔기에 혈안이 되어버린 땅과 그 위에 선 건축물의 의미를, 하여 인간의 삶에 대해 오롯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이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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