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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사람 얼굴을 한 자연…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열쇠

등록 2022-10-14 05:01수정 2022-10-14 09:57

비트겐슈타인 전문가 이승종 교수
후기 철학 해석 틀 ‘자연주의’ 제시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자연주의적 해석
이승종 지음 l 아카넷 l 2만8000원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는 20세기 언어철학의 거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후기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의 저작이다. 비트겐슈타인 전문가인 지은이는 2016년에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를 상세한 주석을 달아 번역 출간한 바 있다. 이 번역·주석 작업을 할 때 지은이가 해석의 틀로 삼은 것이 ‘사람의 얼굴을 한 자연주의’인데, 이 책은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이 자연주의의 양상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언어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가 이성을 사용해 이성의 한계를 규명하는 ‘이성의 자기비판’을 감행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해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는 ‘언어의 자기비판’을 탐구의 본령으로 삼았다. 철학자들이 골몰하는 철학적 문제라고 하는 것이 대개 언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빚어진 일종의 질병이라고 보고 언어의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목표였다.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보여준 태도의 차이가 전기와 후기를 가른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이루어진 명제와 세계의 개별 사태가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고 보았던 데 반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언어의 사용이 인간의 삶의 맥락 속에서 무수히 다양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에 주목했다. 언어의 의미가 삶의 문맥 혹은 삶의 흐름과 연관돼 있음을 밝히려 한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작업이다.

20세기 언어철학의 거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위키미디어 코먼스
20세기 언어철학의 거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삶의 문맥이라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이때 비트겐슈타인에게 원초적인 것은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다. 어떤 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판별하는 것보다, 어떤 것이 의미가 있느냐 무의미하냐를 판별하는 것이 더 앞선 문제라는 것이다. 이 사태를 지은이는 ‘빛’과 ‘사랑’이라는 현상을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 하는 물음은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 또는 불일치를 낳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이 입자인가 파동인가’ 하는 물음은 어떨까? 이런 물음은 애초에 의견의 일치나 불일치가 생겨날 수 없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그런 물음은 애초에 ‘무의미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빛과 달리 사랑은 입자냐 파동이냐를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참/거짓’을 판단하기에 앞서 인간의 언어생활에 전제돼 있는 ‘의미/무의미’의 문제다. 무의미한 문제는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하고 ‘참이냐 거짓이냐’를 두고 논쟁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의미/무의미’를 가르는 차원이 공유돼야 한다. 이렇게 의미와 무의미를 원초적으로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을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Lebensform)이라고 불렀다.

이 삶의 형식은 모든 인간 곧 인간이라는 종 전체에 공통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했다. 그런 공통성의 토대 위에서 언어의 차이나 문화의 차이도 나타난다. 이 원초적인 삶의 형식을 채우는 것이 ‘자연사적 사실’이다. 이때 지은이가 주목하는 ‘자연사’란 자연세계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자연사가 아니라 ‘사람과 관련된 자연사’다. 언어를 사용하는 원초적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 바로 자연사적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자연’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세계 곧 3인칭 자연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펼쳐지는 자연 곧 어떤 본성적인 삶의 상태를 뜻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우리 인간의 ‘언어게임’ 곧 온갖 종류의 언어 활동이 이 자연을 가장 근본적인 토대로 삼아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언어 행위의 최종 근거가 원초적인 자연 상태에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은 일종의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주의를 지은이는 ‘사람의 얼굴을 한 자연주의’라고 부른다. 왜 ‘사람의 얼굴을 한 자연주의’인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자연이 인간 생활 바깥의 어떤 객관적 자연이 아니라 ‘나’와 ‘너’의 무수한 관계로 이루어진 사람들 사이 삶의 사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원초적 공통성이 인간의 모든 언어게임의 토대를 이루며 언어게임은 이 토대 위에서만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이다.

지은이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에 대한 이런 해석을 바탕에 깔고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철학도 상세히 살핀다.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와 신앙의 문제에 관해 극도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이런 침묵에 가까운 자제는 무관심의 증거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는 시대 상황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시대를 암흑기로 표현한 바 있다.(<철학적 탐구> 머리말) 종교와 신앙의 문제야말로 비트겐슈타인에게는 핵심적인 문제였다. 그 비트겐슈타인이 신과 세계의 관계에 관해 밝힌 핵심 명제가 젊은 날 노트에 쓴 “신은 (…) 세계다”라는 간명한 문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동일시한 ‘신과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적 있는 ‘토끼-오리 그림’을 빌려온다. 이렇게 보면 토끼인 그림이 다르게 보면 오리로 드러나는 것과 같이, 비종교인에게는 그저 자연적 세계일 뿐인 이 세계, 곧 나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 종교인에게는 신의 절대성 안에 있는 세계로 나타난다. 신은 세계를 초월해 있는 또 하나의 특수한 존재자가 아니라 이 세계와 함께 이 세계에 의미를 주는 어떤 절대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토끼로 보이던 그림이 오리로 보이는 그림으로 바뀌듯이 시각의 전환, 곧 ‘삶의 방향 전환’과 함께 이 세계가 전혀 다른 의미를 띤 세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지은이는 ‘기적’이라는 것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적이란 데이비드 흄이 말한 대로 ‘인과적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현상을 종교적 태도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 것이 종교인의 눈으로 보면 기적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눈으로 보면 가장 놀라운 기적일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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