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는 지금
역사에서 ‘만일 과거에 이랬다면’ 식의 가정이 무의미다하는 건, 그런 가정이 지금의 현실을 뒤집거나 바꾸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야말로 과거에 대한 가정은 현실의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도 없다. 그게 통설이다. 하지만 꼭 그럴까. 과거에 대한 가정은 때로 현실의 구조와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주체적 변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 가정은 유의미할 수 있다.
미국은 2차대전 뒤의 세계질서 재편 구상에서 아시아쪽 파트너로 중국을 상정하고 있었다. 만일 미국이 지원했던 장졔스가 중국을 석권했더라면 일본은 미국의 전후 아시아정책에서 존재가치를 잃었을 것이다. 현실은 그와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여 중국이 공산화되자 일본은 되살아났다. 일본을 2류 속주쯤으로 만들려던 미국의 구상은 냉전의 시작과 마오쩌둥의 승리, 그리고 나중의 한국전쟁으로 뒤바뀐다. 미국은 추방한 전범자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자국시장을 무한대로 열어 국익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일제 당시의 옛질서를 부활시켰다. 조지 케넌 등 냉전의 설계자들은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옛 권리를 회복하는 등 일제 옛 판도의 주요 부분을 궁극적으로 되살리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동아시아판을 짰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의회 보고에서 미국의 경상적자 문제를 거론하면서 중국의 외환보유고가 급증해 올해 말 1조달러대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의 보유외환 누적액은 2005년까지 8189억달러로 그 전년도보다 2089억달러 늘어 연간 신장율이 34.3%에 달했다. 추세로 보면 보고내용은 기정사실이나 같다. 중국 주요 외환보유 통로는 무역흑자고 미국이 가장 많은 무역적자를 보는 나라가 중국이다. 미국은 유럽연합에 이어 중국 제2위의 교역대상국이기도 하다. 정재호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편찬한 <중국의 강대국화> 등이 지적하듯 중국은 미국의 장래 최대 잠재 경쟁자이면서 현실적으론 미국에 경제·안보를 크게 의존해가고 있다.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자본주의 다리를 건넌 대국 중국은 장차 옛 소련에 이은 미국 최대의 적대세력이 될 수도 있고 우호적 경쟁자나 협력자가 될 수도 있다.
미-중 관계 강화와 일본의 존재감은 반비례한다. 미-중관계가 긴밀해질수록 미국한테 일본의 존재가치, 또는 상품가치는 줄어든다. 일본 번영의 토대는 친일적 미국이며, 이는 일본 조야, 여야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과연 일본이 앞으로도 계속 미국의 아시아정책 교두보 내지 동반자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해갈 수 있을까?
고이즈미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일본판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이 상당한 역풍을 각오하고 야스쿠니 참배에 집착하며 대만 독립을 부추기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이런 역관계들을 고려한 계산된 행동일까.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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