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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국민통합 미디어

등록 2006-03-09 19:51수정 2006-03-10 17:37

지도의 상상력<br>
와카바야시 미키오 지음. 정선태 옮김. 산처럼 펴냄. 1만5000원
지도의 상상력
와카바야시 미키오 지음. 정선태 옮김. 산처럼 펴냄. 1만5000원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와 정체성 확인하며
동일한 국가의 국민으로 인식하는 ‘관념의 도상’
만리장성 쌓기 신민 동원 가능했던 것은 지도 덕분
지리상 발견으로 측량의한 리얼리티 확보
세계화 시대 ‘지도라는 근대’ 넘어설까? 글쎄…
‘지도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지도를 모방한다!’

일본의 사회학자 와카바야시 미키오(44·와세다대 교수)가 1995년에 낸 책 <지도의 상상력>(정선태 옮김, 산처럼 펴냄)은 지도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 볼 것을 요구한다.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거대 국가 중국의 서쪽 끄트머리에 사는 이슬람교도들과 동북쪽의 조선족들이 자신을 동일한 국가의 국민으로 인식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세계지도 속에서 ‘중국’이라는 나라의 영역을 특정한 지도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때의 지도란 중국이라는 국가의 행정적·군사적 통제 범위라는 현실을 도상으로서 투사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만, 지도의 구실은 그런 수동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지도는 거꾸로 그 지도를 보는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를 확인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는 능동적인 측면 역시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도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런 ‘뒤집힌’ 인식을 강조하기 위해 지은이는 책머리에서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주저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언급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을 소개한다. 어떤 제국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은 지도 제작자가 제국의 크기 및 모양을 꼭 닮은 지도를 제작한다. 지도는 제국의 영토를 완전히 덮어 버리는 것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도가 낡고 해지게 됨에 따라 제국의 국력 역시 쇠퇴해 간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국력의 쇠퇴가 반드시 지도의 쇠락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지은이는 지도라는 표상이 그 대상이 되는 현실을 단순 반영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상태와 변화를 추동할 수도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으로서 소설을 끌어들인 것이다.

지도가 낡고 해지면 제국이 쇠퇴

또 한 편의 소설로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만리장성>을 보자. 이 단편에서 고대 중국의 신민들은 자신이 사는 나라의 전체상은 물론 제국의 수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제국과 황제, 그리고 신민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는 다만 관념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제국은 이런 관념의 유지와 강화를 위해 북쪽 오랑캐의 침략 위협이라는 하위 관념을 만들어낸다. 사실 제국의 남단에 사는 신민에게 북방 오랑캐가 실감으로서 다가오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제국의 지도부가 ‘만리장성’을 건축하기 위해 제국 전역의 신민을 동원함은 물론, 동원된 신민들에게 일부러 넓은 범위의 장성 건축 현장을 보게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제국이라는 지도’를 확고히 그려 넣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인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점토판 세계도에는 원반 모양의 육지 중심에 바빌론이 그려져 있고, 그 주위에 몇몇 소도시가 있으며, 페르시아만 북쪽 아르메니아산맥에서 흘러나온 유프라테스강이 육지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로 흘러든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7개의 미지의 대륙이 그려져 있다. 영국 헬리포드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는 13세기 말 세계도는 원형의 대지 중심에 예루살렘이 자리잡고 있으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이미 알려진 영역과 함께 ‘낙원’과 상상 속 동물, 신화적 모티프 같은 허구적 현실 역시 엄연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애버리지니가 씨족이 묘사한 ‘잉가푼카푸’라는 지도. 이 지도는 지형이나 지역이 아니라 땅을 성스럽게 하는 신화적인 세계상과 구체적인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보이는 것만 본다’는 근대적 리얼리즘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결코 지도에 그릴 수 없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애버리지니가 씨족이 묘사한 ‘잉가푼카푸’라는 지도. 이 지도는 지형이나 지역이 아니라 땅을 성스럽게 하는 신화적인 세계상과 구체적인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보이는 것만 본다’는 근대적 리얼리즘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결코 지도에 그릴 수 없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지도는 현실의 사실적인 모사라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념의 투사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관념이 신대륙의 ‘발견’과 같은 사실과 맺는 역설적인 관계다.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동쪽으로 여행해서 만나게 되는 인도를 서쪽으로 가서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해 항해에 나섰다. 그 항해의 결과 그는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이른 것인데, 그 자신은 그곳이 인도와 중국이라고 믿었다.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던 인도와 중국을 향해 떠난 여행이 ‘신대륙’이라는 미지의 영토로 그를 이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콜럼버스의 항해는 미지의 세계를 기지의 세계로 전환했다기보다도 주관적으로 ‘기지의 세계’라고 믿고 있던 세계를 객관적인 ‘미지의 세계’로 전환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들의 대항해 이후 유럽 각국이 세계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지도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실감 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 가령 중세 세계지도인 ‘마파 문디(mappa mundi)’에는 오늘날의 세계 지도와 같은 국경선이 그려져 있지 않다. 국경선이 지도의 핵심으로 등장한 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출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도상의 국경선은 국민국가라는 현실의 투사이겠지만, 거꾸로 근대적 지도가 “근대적인 측량기술이나 지도제작기술에 의해 정확하게 측정된 영역으로서의 국토라는 리얼리티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런 점에서 지도는 신문, 소설, 철도 등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근대국가 이후 국경선 개념 등장

책의 마지막 부분은 ‘지도를 넘어서는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에 바쳐진다. 지도가 이처럼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및 유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는 것이라면, 국민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지도는 유효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 아닐까.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적 정치 동맹체, 거꾸로 일국 내의 서로 다른 민족 및 종교적 세력 사이의 알력과 다툼,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세계시장’을 경영하는 다국적기업들, 그리고 물리적인 영역과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 등은 지도 위에 구현되는 근대적 의미의 구획을 무화시키는 듯 보이지 않는가.

지은이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얼핏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듯 보이는 움직임들도 결국은 철저히 근대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도적 시선’의 변화와 조정은 있겠지만, ‘지도라는 근대’의 극복까지는 아직 요원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결론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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