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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너의 아픔 기댈 ‘의자’가 되어줄게

등록 2006-03-09 21:02수정 2006-03-10 17:40

이정록 시집 <의자>
이정록 시집 <의자>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의자’란 곧 의지처…진한 연민과 공감 배어나는 시집
난해시니 엽기시니 유행과는 거리 먼 ‘정통 서정시’
김수영문학상과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한 이정록(42)씨의 다섯 번째 시집 <의자>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위에 적은 것들은 이정록씨의 앞선 시집들 제목이다. 그를 실제로 만나 보면 알게 되거니와, 그는 엄장 큰 체구와 호방한 주량, 기지와 해학으로 무장한 충청도 사내다. 비슷한 덩치와 술실력에 유머 감각까지 아울러 지닌 동료 문인 유용주·한창훈씨 등과는 심심할 때 팔씨름이나 레슬링으로 몸을 풀기도 한다. 그런 겉모습만을 여겨 보자면, 그의 시집 제목들은 어울리지 않게도 여리고 섬세하다. 다섯 번째 시집에 와서 제목은 한결 건조하고 간결해졌지만,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만은 여전하다.

“백 대쯤/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수렁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불현듯 고개를 꺾어/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저를 후려 팬 노인의/골 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그 긴 속눈썹 속에/젖은 해가 두 덩이/오래도록 식식거리는/저물녘의 수렁논”(<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전문)

고된 노동에 덤으로 매질까지 당한 암소로서는 제 처지가 서럽고 주인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말도 못하고 힘도 쓸 줄 모르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인 몰래 맞은 자리를 꼬리로 어루만지거나 담백한 표정으로 노인을 한 번 바라보는 것뿐이다. 고요하고 무심한 풍경 속에서 맞은 암소의 목주름과 때린 노인의 이마 주름을 이어 붙이는 발상, 그리고 암소의 두 눈 속에서 암소를 대신해 들끓는 저물녘 햇덩이를 포착하는 시선이 돋보인다.

시집 <의자>에 실린 많은 시편들은 이처럼 대상에 대한 진한 연민과 공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대상이 딱히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 속의 동물과 식물, 나아가 무생물로까지 넓어진다는 점이 이정록 시의 큰 한 특징이다. 그의 시에서 인간과 자연과 무생물은 분별과 차등을 버리고 한통속으로 어우러진다.

덩치 큰 충청도 사내의 섬세한 시선

“갈퀴 손으로 새순을 어루만지자/오물거리던 햇살이 재게 할머니의 등에 오른다/무거워라 포대기를 추스르자/손자 녀석의 터진 볼에 햇살이 고인다/엄마 잃은 생떼의 입술이 햇살의 젖꼭지를 빤다/햇살의 맞은편, 그러므로 응달은/할머니의 숯검댕이 가슴 쪽에 서려 있다/늘그막에 핏발 서는 빈 젖꼭지에 있다”(<햇살은 어디로 모이나> 부분)

“청무 뽑아낸 자리/빗살무늬 토기 속으로/첫눈 내린다//토기 안에 남은/무의 실뿌리, 그 얼어붙은 발가락이 안쓰러워/무밭에 눈은 쌓인다”(<첫눈> 부분)

식물의 잘린 실뿌리를 발가락에 비유하는 발상은 시집 맨 앞에 실린 <어린 나무의 발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초봄의 묘목 시장을 그린 이 시에서 아직 어린 묘목에, 단감이 매달린 가지라든가 코팅된 목련꽃 사진 등을 걸어 놓은 모습을 보며 시인은 생각한다: “추위란 게 무언가/이른 봄에 늦가을을 보여줘야 하는 것/한두 살짜리의 어깨가/서른이나 마흔 살의 짐을 지고 있는/그 푸른 멍 자국 아닌가”(<어린 나무의 발등> 부분).

시적 대상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리고 그 고난과 극복의 여정에 마음으로나마 동참하는 것. 이정록 시의 이런 정신을 그의 시집 제목을 빌려 ‘의자의 시학’이라 이를 법하다. 시집의 표제시는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가 던진 ‘한 소식’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허리가 아프니까/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꽃도 열매도, 그게 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의자> 부분)

연민·의지의 궁긍적인 지향은 ‘밥’

의자란 무엇인가. 아픈 허리를 받치고 무거운 엉덩이를 부릴 물건이다. 세상사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히 기댈 상대다. 의자란 곧 의지처인 것. 그러니 ‘의자의 시학’은 다른 말로 ‘의지의 시학’이라 이를 수도 있겠다. 나약하고 의존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뢰와 위안을 주고받는다는 뜻에서 말이다. 의자 곧 의지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다른 시들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돼지머리는/제대로 한 번 앉아보려고/목덜미 아래를 버린 것 같다”(<산 하나를 방석 삼아> 부분)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뒷짐> 부분)

연민과 의지의 궁극은 무엇일까. 인간적, 혹은 생물적 위엄의 최소한을 생각해 보자. 아니 존재의 최소 조건을 따져 보자. 밥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밥(…)/더 무엇을 바라겠느냐”(<대통밥> 부분). 그런 까닭에 시인이 지향하는 것은 결국 “물벼룩과 개구리와 어린 모가/가 닿아야 할 밥의 나라”(<물끄러미에 대하여> 부분)로 수렴된다.

시와 같은 고상한 예술이 고작 ‘밥’ 따위를 노래하다니, 라고는 말하지 마시라. 높고 귀한 것일수록 낮고 천한 것과 통하는 법이다. 시인은 단언하고 있지 않겠는가. “세상의 하느님은 언제나/시다다 조수다 기레빠시다”(<옷 - 이문영에게> 부분)라고.

이정록씨의 시는 난해시니 엽기시로 일컬어지는, 요즘 젊은 시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시적 경향과는 상극에 서 있다. 기발한 착상과 수수께끼 같은 문장, 불편한 이미지 조작에 그는 관심이 없다. 쉽고 친숙한 말투와 풍물에, 경험에서 우러나는 지혜와 교훈을 담는다는 점에서 그는 정통 서정시의 계보에 속한다. 달리 말해 인생파라 할 수도 있겠다. 시를 통해 그는 자신을 경계하고 돌이켜보며, 그런 자경과 자성은 시를 읽는 독자에게도 삶에 관한 모종의 깨달음을 선사한다.

“어린 순 부러지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발길 사나운 것이 삶이라서, 늘/배부른 다음이라야 깨닫는 나여/물끄러미, 개구리밥을 헤치고/마음속 진창을 들여다본다/(…)/끝내/무논의 물결처럼 세상의 떨림을 읽어내기를/써레처럼 발목이 젖어 있기를”(<물끄러미에 대하여> 부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록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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