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l 을유문화사 l 2만원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여든에 이른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다산성의 작가다. 이글턴의 저작은 문학이론을 넘어 문화‧정치‧이념‧종교를 두루 아우른다. 특기할 것은 서로 섞일 것 같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사상이 이글턴 저술을 떠받치는 이론적 토대라는 사실이다. 이글턴의 관심은 ‘비극’이라는 문학 장르에도 뻗어 있는데, 이번에 번역된 <비극>은 <우리 시대의 비극론>(2002) 이후 18년 만에 펴낸 두 번째 비극론이다.
이 책에서 이글턴은 ‘비극은 죽었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의 해답을 찾는다. 여기서 말하는 비극은 우선 고대 그리스 아테네 민주정에서 번성한 그 비극을 뜻한다. 기원전 5세기에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가 창출한 비극은 서양 문학사를 통틀어 최고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스 고전기를 수놓은 이 비극이 예술 장르로서 종말을 고했다는 이야기는 19세기 이래로 수많은 논평가들이 쏟아냈다. 어떤 사람은 에우리피데스의 죽음과 함께 비극 예술이 끝났다고 보고, 어떤 사람은 17세기 셰익스피어‧몰리에르‧라신 비극 이후 이 예술이 소멸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글턴은 이런 비극 종말론의 대표자로 선배 비평가 조지 스타이너(1929~2020)를 불러내 과연 비극이 죽었는지를 탐문하고 자신의 비극관을 상세히 풀어놓는다.
영국의 전방위 비평가 테리 이글턴. 위키미디어 코먼스
스타이너는 <비극의 죽음>에서 ‘진정으로 비극적인 정신은 근대적인 것의 탄생과 더불어 끝이 났다’고 단언한다. 고전 비극은 고귀한 태생의 주인공이 운명의 사슬에 얽매여 몰락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를 그린다. 그런 사태를 보면서 관객은 연민과 공포 속에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우리 시대는 이런 설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시대다. 근대는 과학과 계몽의 세례를 받은 세속주의의 시대이며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민주주의와 평등주의가 보편화한 시대다. 이런 시대에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영웅이 있을 리 없고 삶을 파멸로 이끄는 불가해한 운명이 있을 리 없다. “비극은 고난의 귀족제, 고통의 탁월성을 주장한다.” 이 문장은 스타이너가 비극을 고전 비극으로 한정하는 이유를 요약한다.
스타이너는 비극이 왜 더 존속할 수 없는지를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이념에서 찾기도 한다. 비극은 주인공의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끝나는데,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모두 희망과 구원을 말한다. 기독교는 죽음 너머 천국의 구원을 보장하고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너머 지상의 구원을 설파한다. 이렇게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에서는 비극이 성립할 수 없다고 스타이너는 말한다.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비극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반격한다. 사후의 구원이 지상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 “하느님도 괴로움 속에 죽은 사람들이 기쁨 속에 이승을 떠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희망도 절망적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고통과 슬픔이 있는 한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이글턴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과 라캉의 철학적 후계자인 슬라보이 지제크의 비극론도 비판한다. 지제크는 그리스 비극과 아우슈비츠를 비교하며 아우슈비츠 학살을 비극적 사건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지제크가 보기에 비극은 파멸을 통해 ‘고귀한 정신’을 드러내는 것인데, 홀로코스트는 끔찍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고양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홀로코스트는 견딜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참혹한 사태일 뿐이지 비극적 사건이 될 수 없다. 지제크에게는 언어도단의 사태에서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외설스런 일이다. 이글턴은 지제크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끔찍한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도 부도덕한 일도 아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그 수용소를 만든 이성의 억압적 행태와 한통속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합리성은 이런 극악무도한 일을 끝장내는 데도 핵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글턴은 지제크가 그리스 비극의 어떤 대목, 이를테면 ‘안티고네의 반항’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문제로 삼는다.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 크레온의 명령에 맞서 오라비의 주검을 장사지내겠다고 고집한다. 어떤 논리도 강압도 안티고네를 주저앉힐 수 없다. 안티고네의 이런 행동은 ‘사춘기 유사 실존주의자’의 반항과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런데도 지제크는 “자신의 권리에 대한 (안티고네의) 맹목적 고집”을 찬양한다. 이글턴은 이런 절대적 반항이 ‘좌익 프랑스 사상의 익숙한 특징’이라며 이런 태도야말로 오만한 좌파 엘리트주의라고 일갈한다.
이 책이 논증하려는 것은 비극이라는 예술 양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명제다. 고전 비극이 그 모습 그대로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귀한 사람들의 고귀한 정신’이라는 고전 비극의 특징을 기준으로 삼으면, 현대 비극은 분명 비극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래에서 흘리는 눈물이 높은 데서 흘리는 눈물만큼 쉽게 눈물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인가?” 이글턴은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공쿠르 형제의 물음을 다시 묻는다. 이글턴의 대답은 명확하다. 영웅서사시가 사라졌다고 해서 시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듯, 근대성은 비극을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비극의 성격을 바꾸어 존속시킨다.
영웅이 사라진 시대에는 가장 평범한 사람도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이글턴은 토머스 하디의 <이름 없는 주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불러낸다. 상승의 욕망으로 끝없이 분투하지만 가혹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비참과 죽음으로 끝나는 이름 없는 주인공들이야말로 현대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우리 시대에는 보통사람들에게 파우스트적 갈망의 분출이 허락돼 있기에, 그런 갈망이 불러내는 파멸을 누구든 겪을 수 있다. 인간이 해방될수록 그 해방이 낳는 욕망의 보편성이 역으로 인간 자신을 위협한다.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비극 예술은 세상에 넘쳐나는 비참을 이해하게 해주는 눈이자 인간의 자기 파멸 위험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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