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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성 간 사랑이 성립할 수 없는 시대가 오는가 [책&생각]

등록 2023-02-10 05:00수정 2023-02-10 10:40

아이스
애나 캐번 지음, 박소현 옮김 l 민음사 l 1만8000원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최진영이 근작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작가정신)에 남긴 후기는 이성애적 사랑의 성립 자체가 불가해지는, 말하자면 ‘에로스의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게 한다. 책은 1930년대 진취적 여성 작가 백신애의 세대를 뛰어넘은 남녀간 사랑 이야기(‘아름다운 노을’)에 화답하는 현대 로맨스를 써야겠다는 의도에서 비롯하는데 최진영이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은 이랬다.

“…자, 이제 사십 대 여성과 이십 대 남성의 로맨스를 써보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아무 그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략) 정규를 남자로 설정한다면, 지금 나의 상태로 쓸 수 있는 장르는 범죄나 스릴러뿐이다. 하지만 나는 로맨스를 쓰고 싶었다. 사랑이란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

결국 최진영은 40대와 20대 여성의 사랑, 우정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일찌감치 극대화한 작품의 하나로, 이제 국내에서도 누군가는 애나 캐번의 <아이스>를 꼽을지도 모르겠다. 국내 그리 알려진 바 없으나 1901년 프랑스 칸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로 불행한 자신의 삶을 토대로 소설을 썼으며, 꿈과 환각, 약물중독, 소외·불안을 시현하는 ‘야행성 언어’의 창시자로 간주된다는 애나 캐번은 서구문학계에서 디스토피아 소설의 한 정점을 찍은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 배경에 1967년의 유작 <아이스>가 있다.

프랑스 출생 영국 작가 애나 캐번(1901~1968). 민음사 제공
프랑스 출생 영국 작가 애나 캐번(1901~1968). 민음사 제공

“나는 길을 잃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을 거개 이끄는 인물은 단 셋이다. 한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신념 가득한 남자(‘나’), “빠져나갈 틈 없이 거대한 얼음벽”에 둘러싸여 “절망에 빠진” 여자, 그 여자를 폭력적으로 지배 착취하는 또 다른 남자(‘소장’). 셋 모두에겐 그래야 할 이유나 서사가 생략된 채, 뒤틀리고 부조리한 현실만 있다. 여자는 철저히 관조되고 취급되는 타자로서만 존재하다 제 의견을 갖게 될 즈음, 놀랍게도 여자를 구원하려던 남자와 구속하던 남자는 닮아지거나, 마침내 ‘나’가 여자와 손을 잡고 나온 세계는 “이미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얼음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잔혹하도록 추운 세계”다.

전통적 지배 권력의 세계에서 단 한 순간 멈춘 적 없는 인간(여성)과 자연(기후)의 동시적 파괴라는 형상과 전망에 주력하는 듯, 애나 캐번은 기이한 구조와 집요한 문장으로 주제를 빚어낸다. 인과를 해체하고 형해화하여 현실 속 ‘묻지마 폭력’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격이다.

뒷맛도 쓰다. 이성 간의 사랑이 성립할 수 없는 시대는 다가오는가. 누가 관계의 교각을 파괴하는가. 기후위기가 현실이 되었듯, 캐번의 문학적 예언은 최진영의 진단으로 기어코 증명되는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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