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하재영 지음 l 휴머니스트(2023) 내가 자란 방에는 한쪽 벽을 차지한 책장이 있었다. 원목 필름지가 붙은 오래된 책장에는 먼지 쌓인 책들이 다닥다닥 꽂혀 있었다. 종교 서적, 소설, 수필. 책장에 꽂힌 책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엄마와 아빠는 이 많은 책을 다 읽었을까? 아빠는 퇴근하면 티브이(TV) 앞에서 한숨 쉬다가 방에 쏙 들어갔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며 한숨 쉬었다. 대화보다 한숨과 티브이 소리가 더 자주 울리는 집. 아주 가끔 엄마가 책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엄마 손에는 책이 아닌 술병이 들렸다. 책과 엄마. 엄마와 아빠. 나열한 두 단어 사이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방치된 책에 손을 뻗은 건 나였다. 책과 내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 사람이 언젠가 무척 아끼며 읽었을 책들. 그때 읽은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밑줄 모양은 기억한다. 엄마의 밑줄은 물결 모양이었다. 나는 밑줄을 따라가며 책을 읽었다. 책을 읽기보단, 엄마를 읽고 싶었다. 그때 내게 독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엄마가 읽은 문장이 나에게 떠오른 날이 있다. ‘이혼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믿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게 참사랑이다.’ 종교 서적이었나, 심리 서적이었나. 아마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고민하던 무렵, 아니, 결혼제도 안에서 고립감과 설움을 느끼던 모든 날들에 살고 싶어 책을 들췄을 거다. 예쁜 표지의 책에는 여자의 도리를 지키라는 재촉이 있었고, 엄마는 그 책에 따라 계속 참아왔을 거다. 당장 과거로 달려가서 엄마에게 다른 언어를 선물하고 싶다. ‘당신은 엄마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에요. 이혼은 당신의 실패가 아니라 결혼제도의 실패고, 내 삶을 책임지는 방식이기도 해요. 당신은 여러 겹을 가진 귀한 존재예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익숙해져 감히 다른 자신을 상상하지 못하는 그 여자에게 내가 한 권의 책을 선물할 수 있다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서점을 뒤진 날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엄마’를 소재로 한 책은 넘친다. ‘엄마’는 많은 창작자의 단골 소재다. 누군가는 모성을 찬양하고, 누군가는 불효자는 운다며 자책하고, 누군가는 기준에 벗어난 그 여자를 겨냥하며 모든 게 엄마 탓이라 비난한다. 가장 오염되어서 한없이 부족한 엄마 서사에서 내가 건넬 책이 있을까? 왜 그렇게 살고 있느냐 다그치지 않고, 그간의 노동을 긍정하면서도, 자기 안의 힘을 믿도록 안내하는 책. 그 힘을 느낀 뒤에 어떤 선택을 해도 가만히 곁을 주는 책. 다채로운 표정이 있는 책. 상상 속에서 나는 하재영 작가와 작가의 어머니가 공동 회고록으로 엮은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엄마에게 내민다. 스무 살에 결혼해 남편과 아이를 키우느라 자기를 돌보는 법을 잊고 살던 여자는 모처럼 책 선물에 기뻐할 거다. 제목을 보고 조금은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책을 읽겠지. 책 속 두 여자의 이야기를 읽다가 물결 모양 밑줄을 그을 거다. 그렇게 그들의 삶을 읽다가 어느 순간 멈출 거다. 작가가 그토록 바랐던, ‘엄마의 역할을 맡은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자기 이야기를 발견하고, 책 구석구석에 글자를 적을 거다. 아마 그녀의 첫 문장은 “나는 평범했어.”(22p)로 시작할 수도 있겠다. 홍승은/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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