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시인의 마을] 들판의 트레일러

등록 2023-04-21 05:00수정 2023-04-21 09:23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나는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들판을 가지게 되겠지. 풀이 마르는 냄새가 옷과 피부와 머리카락에 스밀 거야. 당신과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냄새야. 당신은 트레일러에서 빛을 끄고 녹슬어가다 하루에 한 번씩 새로운 연장으로 태어날 거야. 당신은 끽끽거리는 트레일러를 흔들며 요리를 하고 고장난 줄도 모르는 나를 오전 내내 수리해. 나는 차돌 같은 당신의 희고 큰 치아 밑에서 퍼지고 잘리고 조여지면서 점점 쓸모 있어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독초와 뱀과 바위가 많았으면 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던 곳도 좋아. 그런 곳일수록 진귀한 풀과 나무와 꽃이 가득하니까.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 좋아하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망쳐버리기 일쑤니까. 나는 매일 저녁 심장을 갈가리 찢는 노을을 구경하고 밤이면 부엉이 눈 밑에서 당신을 소재로 시를 쓸 거야. 어느 날 혼자 보는 별이 더 아름답다 생각되면 내 부츠를 풀밭에 던져. 돌이 별이 될 만큼 멀리 떠나가줄게.

- 김개미의 시집 <작은 신>(문학동네)에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