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 아래 푸근한 손님맛이 이물없다
헌책방 순례/상계 책백화점 지하철은 움직여 도시스럽다. 전동차가 점에서 점으로 달리고, 실려온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부지런히 옮겨간다. 승객이 멈추면 전동차가 움직이고, 전동차가 멈추면 승객이 움직인다. 도시스럽기는 밤낮이 구분되지 않음에서 역시 그렇다. 지하철에서는 자연시간이 멈추고 인공시간이 흐른다. 아침 10시반은 10:30, 낮 2시는 14:00이다. 지하철 4호선, 인공시간은 쌍문역을 지나서야 비로소 자연시간으로 회귀한다. 유리차창이 제 구실을 하면서 전동차와 승객 역시 문맥을 갖는다. 상계역 1번 출구를 나서면 덜 깬 시간각은 공간각조차 둔하게 만들어 책방을 코앞에 두고도 허둥대게 만든다. 본디 입구는 좁게 마련. ‘상계 책백화점’(02-932-8233)으로 이어지는 하향 계단은 유난히 좁다.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가 더 좁다. 책방이 넓음은 들어가서야 보이고, 나오면서 책방의 넓음과 계단의 좁음이 비로소 만나기 때문이다. 책백화점에서 자연시간을 재차 잃어도 섭섭하지 않음은 그 잃음이 형광빛의 무시간성 탓이 아니라 책더미의 난시간성 탓인 까닭이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서현, 효형출판), <중국고대음악사>(양인리우, 솔), <검은고독 흰고독>(메쓰너, 평화출판사)은 틈입자를 장르와 시간과 공간의 현묘한 경계로 이끌지 않겠는가. 20여평 사방 책벽에 2×2 서가가 레일식 책꽂이 또는 허리춤 쌓기로 두겹씩이다. 중고교 교과서·참고서와 일반서적이 반반이다. 상계책백화점은 자매가 운영한다. 언니 김순옥(51)씨가 매장을 지키고 동생 선옥(49)씨는 밖으로 돌며 책을 구해 들인다.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순옥씨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이으며 책을 흩트리고 선옥씨는 궁둥이 붙일 새 없이 두 군데 지하에 책을 쌓는다. 이날도 잠시 얼굴을 비친 선옥씨는 사진기 앞에 몇 차례 서고는 흩어진 책을 찾아 휙 달아났다. 선옥씨의 남편 이강석씨가 결혼 전부터 도남동, 합정동, 부천 등지를 돌며 책방을 꾸리다가 이곳 상계동에 정착한 것이 14년 전. 남편은 신학공부를 해 목사가 되고 책방은 주로 선옥씨 몫이 되었다. 6년 전 사고와 백혈병으로 남편들이 잇따라 곁을 떠나면서 언니가 책마을에 합류하고 자매는 운명처럼 하나로 묶였다. 3년 전에는 방학동에 30여평의 분점(3491-4865)을 냈다. 망우동에서 이곳 대진여고로 전학온 한 학생이 엄마와 함께 교과서와 참고서를 한아름 고르고 방학동에서 왔다는 주부는 어디선가 잘못 산 책을 꺼내놓고 상의 끝에 다른 책을 안고 나갔다. 주인과 손님이 서가 앞에서 조곤조곤 터놓고 얘기하는 게 이물없다. 판타지소설 20여권을 묶어온 중년남자는 2000원에라도 사라며 떼를 쓰다가 그마저 안 되자 아쉽게 돌아섰다. 순옥씨는 일주일 두차례 화, 목요일은 6시에 퇴근한다. 다니는 교회에서 자신이 지휘하는 여성성가대에서 부를 노래를 고르고 연습하기 위해서다. 책을 워낙 좋아하지만 그렇게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 그동안 1년 반에 걸쳐 신구약 전체를 필사하기도 했다. 지하 책방에서 땅 위의 현실로 돌아가는데 짧은 계단으로는 충분치 않은 게다. 주인은 성가대와 성경에의 몰입이 필요했고 틈입자는 방학점에 이어 혜성서점을 들러야 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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