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 시집 <밤 미시령>
“이제는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나를 찾으러/
제일 아름다운 사람 하나와/가다가 나는 없어지고…”
자기 상실에서 자기 회복으로 나아가는 여정 보여줘
그의 시가 난해하다고? ‘모호함’을 그대로 즐겨라
제일 아름다운 사람 하나와/가다가 나는 없어지고…”
자기 상실에서 자기 회복으로 나아가는 여정 보여줘
그의 시가 난해하다고? ‘모호함’을 그대로 즐겨라
고형렬(52)씨의 새 시집 <밤 미시령>이 창비에서 나왔다.
“유람으로나 가겠다/제일 마음 가난한 사람 하나와/곁에 초라한 나를 세워/그를 위해서/세월의 강물 건너가는 그림자로/얼굴도 팔도 하나가 된/이제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나를 찾으러/제일 아름다운 사람 하나와/가다가 나는 없어지고/그 사람만 남게 해”(<강상(江上) 유람(遊覽)이라면> 부분)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시 <강상 유람이라면>에는 시인의 가치와 지향, 현주소와 시적 특징이 두루 보인다. “마음 가난한 사람”에 대한 시인의 가치 부여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에 이어지는 “초라한 나”라는 표현은 자신을 낮추면서 반사적으로 ‘마음 가난한 사람’을 높이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몇 줄 뒤의 “제일 아름다운 사람”은 당연히 ‘가난한 사람’의 변주다.
그렇다면 시인의 현주소와 지향은 각각 어떤 것일까. “이제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나를 찾으러”에 그것들이 들어 있다. ‘나를 찾는다’는 것만큼 시, 그리고 문학이 그 태생에서부터 자신의 업으로 삼아 온 일이 따로 있을까. ‘나를 찾는’ 행위는 현재 상태에서 시인이 그 ‘나’를 잃었음을 전제로 한다. ‘나’를 잃고 ‘나’를 찾는 것이 이 대목에 나타난 시인의 현실과 지향이다. 문제는 그 뒤에 나오는 구절이다. “가다가 나는 없어지고/그 사람만 남게 해”라는 것은 얼핏 보기에 ‘나를 찾는’ 일과는 배치되는 것 같다. 나를 찾으려는 행보가 그 ‘나’를 없애는 것으로 귀결되다니! 시인은 자아 탐색의 여정을 포기한 것인가?
기존 시문법 깨뜨린 ‘무기교의 기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찾는 일과 없애는 일이 둘이 아닌 하나인 경지,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나’의 불구적 현실을 ‘그 사람’의 바람직한 모범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이런 모순적 진술을 낳았을 것이다.
이 시에서는 비교적 덜하지만, 고형렬 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 모호성과 천진성을 들 수 있다. 고씨의 시들은 어쩐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가 난해한 시적 기교를 동원하거나 고도의 암시와 상징을 구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고형렬 시의 까다로움은 오히려 그가 통상의 시적 기교와 상징체계를 거부하는 데서 온다고 할 수도 있다. 독자 쪽의 방법론적 무장을 여지없이 해제시켜 버리는 ‘무기교의 기교’가 거꾸로 난해성으로 귀결되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그의 시는 기존의 시 문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독자적인 발상과 발성법으로 무장하고 있다. 시인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기억에 의존할 뿐 읽는 쪽의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는 철저히 사적인 상징과 연상의 비약이 그의 시를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시를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를 일종의 행갈이된 산문적 진술로 여기는 이들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모호한 이미지와 상징을 명백한 서술로 풀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 말이다. 그의 시를 제대로 읽는 방법은 모호함을 모호한 대로 그냥 놓아 두고 전체로서의 시를 즐기는 것이다. 적어도 시에는 모호성의 권리가 있다는 것이 시인의 믿음이다.
그럼에도, 모호성의 장막을 통해서 짐작되는 시집의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인은 자기 상실과 자기 회복 사이의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다. 시에 따라서 ‘잃어버린 나’를 강조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되찾은 나’를 향한 의지를 불태우는 쪽도 있다. 또는 그 둘 사이에서 분열적인 자의식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달려라, 호랑아>가 대표적이다.
작고한 동향 시인을 향한 정 ‘절절’
“달려가는 호랑의 껍질은 아무것도 아니다/두 앞발 사이 깊숙한 가슴 근육/덜겅거리는 심장, 출렁이는 간, 긴장하는 목뼈/헉헉대는, 터질 듯한 강한 폐 근육/얼룩거리는 붉은 어깨와 엉치등뼈, 거기 붙은 살점들/…/무거운 육신을 잔혹하게 흔들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모자이크된 육체가 뛰어가는 정신”(<달려라, 호랑아> 부분)
‘껍질’과 근육 또는 장기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이 대조적 가치로서 대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을 호랑이에 비유할 때, 그가 수긍하는 것은 알맹이 또는 정신일 뿐, ‘껍질’과 ‘육체’는 진짜로서의 알맹이를 치장하거나 가리는 훼방꾼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엄연한 것은 호랑이가 내부와 외부를 한 몸에 지닌 동물이라는 것이다. 내부만 취하고 외부를 버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 때문일 것이다. 시의 결미가 분열적 진술로 나아가는 것은.
“더러운 자식! 더러운 자식! 하며/달려라 조금만 더, 뛰어라 호랑아/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 달려라”(<달려라, 호랑아> 말미)
자기 혐오와 학대는 자존과 자기애의 뒤틀린 표현일 수 있다. 이상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현실의 자기에 대한 불만과 부정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늘 속에 떠 있는 수많은 돌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돌>)이라든가 “텅 빈, 파란, 깊은/무소(無巢)의 공중”(<고니 발에는>)이 시인이 지향하는 이상적 자아의 표지라면, “상스럽고 허무하게 터엉, 서 있다”(<파주 북시티의 마지막 담배>)거나 “소용없다, 모두 불행하고 다 싫다고 하면서/울어요”(<싸우는 별을 보며>)는 자기 혐오와 세계 부정의 노골적인 표출에 해당한다.
자기 상실에서 자기 회복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시인의 시선은 자주 고향 속초 어름을 향한다. “바다 모래불 가 눈발을 그리는 20년 객지”(<조태 칼국수>)라거나 “내 맘 설악산은/이곳에서 다 살다 더 누추해야 돌아갈 곳”(<단풍연어 매만지면서>)과 같은 구절들은 고향 상실이 자기 상실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말해준다. 특히 여러 편의 시들에서 시인은 작고한 동향의 시인 이성선을 향한 추모의 정을 절절히 노래하는데, 표제시는 바로 그의 부음을 듣고 차를 몰아 속초로 향하던 중 미시령 고개에서 쓰여진 작품이다.
“우리 무슨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잠드는 속초 불빛을 보니/그는 가고 없구나/시의 행간은 얼마나 성성하게 가야 하는지”(<밤 미시령> 부분)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 시에서는 비교적 덜하지만, 고형렬 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 모호성과 천진성을 들 수 있다. 고씨의 시들은 어쩐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가 난해한 시적 기교를 동원하거나 고도의 암시와 상징을 구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고형렬 시의 까다로움은 오히려 그가 통상의 시적 기교와 상징체계를 거부하는 데서 온다고 할 수도 있다. 독자 쪽의 방법론적 무장을 여지없이 해제시켜 버리는 ‘무기교의 기교’가 거꾸로 난해성으로 귀결되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그의 시는 기존의 시 문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독자적인 발상과 발성법으로 무장하고 있다. 시인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기억에 의존할 뿐 읽는 쪽의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는 철저히 사적인 상징과 연상의 비약이 그의 시를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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