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쓴 편지
이순원 지음. 비앤엠 펴냄. 10500원.
이순원 지음. 비앤엠 펴냄. 10500원.
잠깐독서
소설가 이순원(49)씨의 산문집 <길 위에 쓴 편지>는 <한국일보>에 연재됐던 일일 칼럼을 모은 것이다. 200자 원고지로 서너 장에 불과한 짧은 글들이다. 짧다고 해서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표제작을 보자. 고향 동네에 마을 일꾼이 있었다. 학교교육의 세례를 받지 못한 탓에 쓸 줄 아는 거라곤 제 이름 석 자뿐이다. 다음으로 배운 게 ‘금초’라는 말. 집집마다 소를 키우는 주민들이 제 집 논둑의 풀을 베어가지 말라는 뜻으로 팻말에 써 놓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짝사랑하는 동네 처녀의 이름 쓰기를 배운 이 아저씨, 일 하러 가는 길가에 호미와 낫으로 삐뚤빼뚤 ‘편지’를 쓴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아저씨 당신의 이름과 ‘금초’, 그리고 짝사랑하는 처녀의 이름.
산문집을 통독하다 보면 이순원씨가 넓은 의미의 ‘가족주의자’이자 ‘추억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를 거쳐 형제들로 이어지는 집안의 수직적 질서, 그리고 친척과 이웃들로 퍼지는 수평적 조화가 그의 세계를 아름답게 지탱한다. 가령 그는 자식이 글을 쓰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함부로 전화를 하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전해 듣고 ‘글은 혼자서 쓰는 게 아니다’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협조가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통고지설 양강지풍 일구지난설’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한자숙어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지다. 강원도의 통천과 고성은 눈이 많이 내리고, 그 아래 양양과 강릉은 바람이 많이 부는데 그것을 한 입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란다. 작가의 고향인 강릉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상어로 쓰인다고. 처마에 눈이 닿아 김칫독을 묻은 곳까지 간신히 굴을 팠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이 이층 창 밖으로 보이고, 길이 미끄러워 발 밑만 보고 걷다가는 늘어진 전깃줄에 목이 턱턱 걸린다는 저 유명한 강릉의 눈에 관한 이야기도 가히 신화적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