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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랑의 상처’ 먹고 자란 독버섯

등록 2006-03-30 21:22수정 2006-03-31 16:43

함정임 소설집 <네 마음의 푸른 눈>
함정임 소설집 <네 마음의 푸른 눈>
상실·죽음의 여운 속에 힘겹게 나아가는 삶
삶이라는 치명적 질병, ‘사랑’이 구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있어, 상처가 있고, 소설이 있다
이번 소설집은 작가 ‘과거의 마음’ 새겨넣은 화폭
함정임(42)씨가 새 소설집 <네 마음의 푸른 눈>(문학동네)을 펴냈다. 2002~2004년 사이에 발표한 11편의 중단편이 묶였다.

상실 혹은 죽음
행복한 이들의 평탄한 이야기가 소설로서 성립할 수 있을소냐. ‘행복 문학’이란 차라리 형용모순이라 해야 옳으리라. 소설, 나아가 문학이란 상처를 먹고 사는 독버섯인지도 모른다. 상처 없는 곳에 문학 없다. 함정임씨의 소설 주인공들은 졸지에 남편 또는 연인을 여의거나(<문어에게 물어봐> <꽃 피는 봄이 오면> <소금 한 줌> <푸른 모래>),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거나(<네 마음의 푸른 눈> <부다페스트에서 순이는>) 한다. 그들의 삶은 상실 혹은 죽음이라는 불리한 조건 위에서 위태롭게 지속된다. 소설은 상황 한가운데서가 아니라 그것이 남긴 여운 속에서 포복하듯 힘겹게 앞으로 나아간다. 미열에 들뜬 듯 흔들리며 나부끼는 문체로 작가는 일종의 ‘후일담’을 들려준다. 상처 이후의 삶. 상처의 주민들에게 소득이 없지는 않다. <부다페스트에서 순이는>의 주인공은 발가락 통증을 가라앉히고자 ‘루카치 온천’을 찾았다가, 실종된 아들의 이념적 지표였던 마르크스주의자 ‘루카치’를 만난다. <소금 한 줌>의 주인공에게 소금 한 줌은 잘 못 뒤집어쓴 불길한 ‘고수레’임과 동시에 불행 속에서도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동력 또는 항체이기도 하다.

삶이라는 질병
이별이나 죽음이 아니더라도 많은 등장인물들이 크고 작은 병증에 시달린다. 유사자폐증(<네 마음의 푸른 눈>), 면역 시스템 이상에 의한 입술 각질화(<벼락 치는 4월 오후 세시>), 방콕족 히키코모리(<엷은 안개 사이로>), 심지어는 담배꽁초와 성냥개비, 이쑤시개 따위를 입 속에 집어넣는 증세(<꽃 피는 봄이 오면>)까지 그 유형은 다기하다. 그러기로 치면 야밤에 귀가해 삼겹살을 구워 먹고서야 잠자리에 들곤 하는 남편(<벼락 치는 4월 오후 세시>)이나 고시를 핑계 대고 반지하 방에 틀어박혀 인터넷에만 몰두하는 또 다른 남편(<엷은 안개 사이로>) 등도 일종의 환자라 해야 하리라. 그런 병증들이 당장의 죽음을 불러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작가가 삶을 일종의 질병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급성이든 만성이든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삶은 과연 질병이다.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삶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맞설 유력한 무기로 사랑을 드는 견해가 많다. 사랑은 과연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은 산소 같은 것이지만, 또한 사랑은 벼락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은 살게도 하지만, 또한 사랑은 죽게도 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매번 첫사랑이고, 동시에 매번 마지막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첫사랑은 산소처럼 가볍고 깨끗하지만 마지막 사랑은 죄처럼 무겁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274쪽)

“사랑 없이 살 수는 있어도 사랑만으로 살 수(는) 없다”(275쪽). 사랑은 문제의 종결이라기보다는 그 시작이다. 사랑이 있어 상처가 있고 문학도 가능해진다.


링크 그리고/아니면 어긋남
<버드나무 아래 고요히>의 여주인공 ‘나’에게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찾아온다. 결혼한다며 미국으로 떠난 지 십삼 년 만에 돌아온 옛 친구 ‘류’, 그리고 마흔 줄에 접어든 독신주의자 ‘나’에게 문득 가능성으로서 다가온 남자 ‘송’이 그들이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이들이 부부였으며(!) 나와 (다시) 만날 무렵을 전후해 이혼했음이 드러난다(이혼한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성(城)이 의미하는 것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남과 여는 이십여 년의 세월에 걸쳐 몇 차례나 만날 뻔하다가는 어긋나고 서로에게 다가갔다가는 마지막 순간에 다시 멀어지는 식의 관계를 이어 간다. 이들의 관계는 언어학에서 말하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관계를 닮았다. 가까이 다가가기는 하지만 끝내는 만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버드나무 아래 고요히>의 주인공이 뜻밖의 ‘링크’를 의도하지 않았듯이, <성이 의미하는 것…>의 두 주인공도 딱히 어긋남을 목표 삼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되어 버렸던 것. <성이 의미하는 것…>의 또 다른 인물은 “흔적 없이 사라진 성이야말로 진짜 성”(225쪽)이라고 말하는데, 이 때의 성을 관계의 은유로 볼 수 있겠다. 맺어진 관계보다는 무산된 관계 쪽에 관계의 본질이 있다는 뜻. 인생의 참맛은 그처럼 어긋나고 빗나가는 데에 있다는 통찰.

일산에서 부산으로
부다페스트에 간 인물이 있는가 하면, 바그다드로 갈 예정인(<꽃 피는 봄이 오면>) 인물도 있다. 아니, 바그다드로 갈 예정인 인물은 그에 앞서 반도 서남단의 항구도시와 충남 보령을 찾으며, <호퍼의 주유소>는 부산으로 짐작되는 ‘P(피)시’ 인근을 무대로 삼고, 마지막 소설 <푸른 모래>의 여주인공은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푸른 모래>의 주인공은 새도시에 살면서 “부산에 한번 다녀오긴 해야 했다”(46쪽)던 <문어에게 물어봐>의 주인공과 같은 인물이 아닐까. 남편과, 이어서 친구 사이였던 동료 소설가 역시 병으로 죽은 뒤 “어쩌면 그렇게 한번 소리 죽여 울기 위해 매년 나는 비행기를 탄 것인가”(44쪽) 자문하는 그는 작가 자신의 가탁이 아닐 것인가. 그리고 함께 떠오르는 그의 전 남편 고 김소진과 역시 요절한 소설가 채영주.

함정임씨는 지난해 8월, 가까운 이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청첩장 대신으로 보낸 뒤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는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의 직장이 부산인데다, 그 역시 이번 학기부터 동아대 문창과의 전임이 된 것. 그렇다면 소설집 <네 마음의 푸른 눈>은 김소진과 함께했던 일산 시절을 마감하고 부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 함정임씨 자신의 마음의 무늬를 새겨 넣은 화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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