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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소설 ‘밥상’ 위 그만의 음악 ‘반찬’

등록 2006-04-13 21:58수정 2006-04-14 14:13

이강숙 첫 단편집 <빈병 교향곡>

음악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일가를 이룬 뒤 작가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구가하고 있는 이강숙(70)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첫 단편집 <빈병 교향곡>(민음사)을 펴냈다. 이 전 총장은 2001년 <현대문학>에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이 된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2004년에는 장편 <피아니스트의 탄생>을 내놓기도 했다.

소설집에는 아홉 개의 단편이 묶였다. 대체로 자전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이다. 그렇다는 것은 주인공이 은퇴한 노인이거나 음악과 관련된 인물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수록작 가운데 제목에서부터 음악을 표방한 것이 셋이고,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도 음악은 핵심적인 소재나 주제로 동원되고 있다. 가령 <고구마의 무덤>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인 ‘노인’은 은퇴한 뒤 뒤늦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슈베르트 가곡 <홍수>를 제 손으로 연주하고 싶어서다. “‘미숙의 극’에 달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재구성해낸 소리로부터 <홍수>의 ‘소리 통로’를 경험하게 되는 행복감”이 그의 잿빛 삶에 아연 생기를 불어넣는다.

<기가 막혀서>라는 작품의 주인공 혁진은 아마도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은퇴한 뒤 지금은 ‘좋은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는 현재의 작가 자신에 가장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청년 못지않은 설렘과 각오로 소설 쓰기에 임하려는 그에게 부인은 냉정하게 충고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우러러볼 것으로 기대하진 말아라, 시나 소설 같은 것들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부인의 충고는 물론 섭섭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작가 이강숙씨의 문학적 열정을 꺾지는 못한다.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쉽게 쓸 수 없는, 그만의 소재와 주제가 있는 것이다. 음악학자이자 교육자로서의 오랜 경륜을 담은 소설이라면 그가 어느 누구보다 잘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한국 소설이라는 밥상에 자기만의 반찬 한 가지 정도는 올려 놓을 수 있는 처지란 말이다.

예컨대 <즉흥연주를 하는 사람들>에는 피아노 건반 그림과 음정에 관한 설명이 등장한다.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 보기 힘든 ‘이강숙표 소설’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만한 면모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서 음악은 단순히 예외적인 소재로서 동원될 뿐만 아니라 삶을 보는 렌즈로 구실한다. ‘삶은 즉흥연주이며,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즉흥연주 하는 연주가’라는 통찰이 그 한 증거다.

음악가 출신 소설가의 진면목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표제작이다. 주인공은 호주의 청소년 음악캠프에 초청 받아 간다. 캠프를 마감하면서 주최측은 참가 학생들로 하여금 빈병을 불어서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연주하도록 한다. 각자가 ‘자기의 음’을 연습해 두었다가 해당 음이 나올 때 병을 불어 그 음을 내는 식이다. 물론 곡 전체를 끝까지 연주하지는 못한다. 악기가 아닌 병을 불어서 내는 음이므로 불완전하고 서투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자기 음을 가진다’는 것이 삶에 임하는 주체적인 태도를 은유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연주는 미완성인 채로 끝났지만 소설까지 덩달아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연주가 끝난 뒤, 젊은 학생들은 불빛 환한 건물 안에 모여 댄스파티를 벌이고, 그 광경을 주인공은 어두운 골목에서 혼자 바라본다. 빛과 어둠, 여럿과 혼자, 무엇보다 젊음과 늙음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한때는 나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라고 주인공은 되뇌는 것인데, 어둠과 고독을 낳는 것이 결국 늙음임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쓸쓸한 장면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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