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8번째 시집 <그래서 당신>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하것네/저 산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
꽃은 마은속 불덩이 헤집은 뒤 속절없이 져버리고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
어지러워라 환장하것네/저 산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
꽃은 마은속 불덩이 헤집은 뒤 속절없이 져버리고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
초봄, 산수유꽃을 보러 내려간 구례 산동마을에서 김용택(58) 시인 부부와 맞닥뜨렸다. 서울에서 온 손님들 안내 겸해서 부인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노라고 했다. 몇 해 전에는 시인을 따라 광양 매화마을에 가서 매화꽃을 보았댔다. 다시 여러 해 전의 어느 봄에는 그의 모교인 임실 덕치초등학교 운동장가의 만개한 왕벚꽃 그늘 아래 들어 있었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허밍코러스가 들려 올 듯, 어쩐지 따뜻한 슬픔에 잠겨 드는 느낌의 오후였다.
김용택 시인과의 기억이 주로 꽃을 배경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생각해 보면, 그는 고향의 사계 중에서도 뭇 꽃이 다투어 피는 이맘때를 가장 사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봄이면,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수화기 너머로 그가 전하는 꽃 소식을 듣곤 했다. 매화니 산수유니 벚꽃이니 하는 유명짜한 꽃들만이 아니라, 집 마당과 학교 뒷산, 강변 자갈밭 등지에 피는 작고 여린 꽃들에게도 그의 애정과 감탄은 에누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섬진강의 시인이요 동심의 시인인 것에 못지않게 꽃의 시인이기도 한 것 아닌가.
그가 <연애시집> 이후 4년 만에 펴낸 여덟 번째 시집 <그래서 당신>(문학동네)은 꽃의 시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래요/봄에만, 죄가 꽃이 되지요/누구든 다 그렇게/버릴 수 없는/빈 꽃가지 하나씩/마음에 꽂아두고/그래도 이렇게 또 오는 봄/가는 봄을 살지요”(<그래요> 부분)
“흰 꽃 곁을 그냥 지나쳤네/한참을 가다 생각하니/매화였다네/돌아가서 볼까 하다/그냥 가네//너는/지금도 거기/생생하게 피어 있을지니/내 생의 한때/환한 흔적이로다”(<생생(生生)> 전문)
‘환한 흔적’이란 차라리 점잖은 편. 꽃은 또한 ‘뜨거운 불덩이’이기도 한 것을.
“내 안//어느 곳에//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불덩이가 숨어 있었던가요//한 생을 피우지 못하고 캄캄하던 내 꽃봉오리,//꽃잎 한 장까지 화알짝 다 피워졌답니다//그/밤//그/곳//그대/앞에서”(<만화방창> 전문)
꽃은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운 관조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와 교감하거나 나아가 주체의 상태를 대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꽃을 노래하는 시인의 어조가 때로 격렬하게 요동을 치는 것은 그의 마음 속 불덩이를 꽃이 헤집었기 때문이다.
급박한 감정의 물살 드러내는 ‘시방’
“염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봄날은 간다> 중 ‘진달래’ 전문)
비슷한 말투가 단풍에 관한 시에서도 발견되는 것이 흥미롭다. 시집에는 단풍을 노래한 시들이 여럿 보이는데, 이 경우 단풍은 영락없이 꽃의 대체물이 아니겠는가.
“거시기 뭐시냐//저 단풍나무 아래//나도 오만 가지 색으로 물들어갖고는//그리갖고는 그냥 뭐시냐 거시기 그리갖고는 그냥//확 타불고 싶당게//너를 생각하는 내 맘은 시방 짧은 가을빛에 바짝 마른 장작개비 같당게//나는 시방 바짝 마른 장작이여! 장작”(<마른 장작> 부분)
한국 시문학사에서 ‘시방’을 선점한 것은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였다(그러고 보니 이 시도 꽃을 노래한 작품이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에서 ‘시방’은 위험의 급박한 정도를 강조하고자 동원되었다. 김용택 시인의 시들에서도 ‘시방’은 감당하기 어렵도록 육박해 오는 감정의 물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김춘수의 시가 존재와 인식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담은 반면, 김용택 시인의 시들은 즉발적인 정서의 표출에 주력한다는 차이를 보인다.
“매화꽃이 피면//그대 오신다고 하기에//매화더러 피지 마라고 했어요//그냥, 지금처럼//피우려고만 하라구요”(<매화> 전문)
시집 맨 앞에 놓인 <매화>에서 시인은 뜻밖에도 피어나는 꽃에 대한 경계와 경고를 발한다. 왜일까. 꽃이 피면 온다는 ‘그대’를 보기 싫어서? 아니,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꽃은 피면 또한 진다는 것을. 개화란 낙화로 가는 징검다리일 따름이라는 것을. 그러니, 피는 꽃을 차마 어찌 눈 뜨고 보겠는가. 그 눈 감기도 전에 꽃은 또 속절없이 지고 말 것을. 앞서 민망함을 가장해 흥분된 심사를 토로했던 <봄날은 간다>의 화자가 꽃 진 뒤에 느끼는 한기와 허무를 보라(여기도 ‘시방’이 나온다).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봄날은 간다> 중 ‘서리’ 전문)
꽃 진 자리에 남는 것이 침묵이 아니겠는지. 사실 시집에는 꽃의 ‘만화방창’을 노래하는 시들의 흥분되고 장황한 언어들보다는 ‘낙화’의 적막함을 표현한 성근 시행들이 더 많이 보인다.
개화란 낙화로 가는 징검다리
“앞산//산벚꽃//다 졌네//화무십일홍, 우리네 삶 또한 저러하지요//저런 줄 알면서도 우리들은 이럽니다//다 사람 일이지요//때로는 오래된 산길을 홀로 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답니다//보고 잡네요//문득//고개 들어//꽃,//다 졌네”(<화무십일홍> 전문)
“꽃 폈다/능소화 진다/한낮 불볕 속/깊이 살을 파는/생살의 뜨거움/피가 따라 흐른다/우지 마라/말을 죽이고/나를 죽이고/도도해져서/산처럼 서다”(<적막> 전문)
시집 전체에 편재해 있는, 짧고 생략이 많은 시행들의 절정은 아마도 <달>일 것이다. 아무런 상황과 맥락을 제시하지 않는 이 수수께끼 같은 시는 왠지 미당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을 떠오르게도 한다.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의 저 절대 긍정과 위안의 말을.
“그래, 알았어//그래, 그럴게//나도… 응//그래”(<달> 전문)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시인이 ‘자서’에서 특별히 언급한 <남쪽>을 읽어 보자.
“외로움이 쇠어/지붕에 흰 서리 내리고//매화는 피데//봉창 달빛에//모로 눕는 된소리 들린다//방바닥에 떨어진 흰 머리칼처럼//강물이 팽팽하게 휘어지는구나//끝까지 간 놈이//일찍 꽃이 되어 돌아온다”(<남쪽> 전문)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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