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성계의 대모인 이효재 전 이화여대 교수(82·경신사회복지재단 부설 사회복지연구소장)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평전(<아버지 이약신 목사>·정우사)를 펴냈다.
이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했고, 해방직후에는 보육원(당시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사회복지 개념을 일찌기 선보인 인물이다. 1898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평양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한 이 목사는 오산중학교 동기동창인 주기철 목사와 인연으로 경남 웅천에 내려와 이 지역에서 일어난 장로교 고신파의 목사가 됐다. 49년 경남장로교 법통노회 초대 회장과 소천 전해인 56년 고신파 교단총회 1대 회장을 역임했다.
고아 출신으로 5녀1남의 자녀를 둔 그는 45년 12월초엔 진해 최초로 ‘희망원’이라는 보육원을 열었고, 한국전쟁 뒤에는 사회복지재단인 경신재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신사참배 거부와 이에 따른 일본 경찰의 탄압은 이 목사의 인생과 가족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38년 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로 공식 가결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이 목사는 경찰에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고, 온 가족은 만주 친척집으로 도피길에 올랐다. 이 전 교수는 “지금도 긴장과 두근거리는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고생이 심했던 가족의 수난기”라고 되돌아봤다.
평전에는 해방 뒤에도 자숙과 교회의 회개를 거부한 친일 목사들의 이야기와 기독교계의 분열상이 소상하게 기록돼있다. 이밖에도 지은이는 교육에 대한 이 목사 부부의 열의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조국 해방과 유아 보건에 힘썼던 고모 이야기도 함께 실었다. 고모 이애신은 특히 이 전 교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97년 낙향한 뒤 ‘마음으로 입양한’ 딸과 ‘2인 공동체’를 이뤄 사는 것에도 고모의 영향이 컸다.
이 전 교수는 “신앙인으로서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아버지, 여성으로서 당당히 살아간 고모의 모습이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며 “중앙 엘리트 중심의 역사가 아닌, 지방 민중의 생활사를 통해 우리 사회사를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겠다고 생각해 평전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해방과 더불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교단 내에서는 신사참배에 앞장선 목사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이들이 그대로 주류를 이루고 간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 전 교수가 아버지의 평전을 교단 밖에서 직접 펴내게 된 이유로도 읽힌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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