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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국인 삶의 궤적 ‘맵짜다’

등록 2006-05-11 21:10수정 2006-05-12 17:18

김열규 <한국인의 자서전>
김열규 <한국인의 자서전>
원로 민속학자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가 새 책 <한국인의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을 내놓았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한국인의 삶의 궤적을 신화와 상징을 통해 한 줄에 꿰어 설명하고자 하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에게 죽음이 지니는 의미를 고찰한 5년 전의 저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의 짝패라 이를 법하다.

김 교수가 한국인의 집단 자서전을 작성하기 위해 동원하는 수단은 신화와 전설, 구전 설화와 문학작품, 민속 등속이다. 반백년에 걸친 연구와 답사를 통해 축적된 자료는 그의 서술에 재미와 설득력을 부여한다. 노학자는 흡사 손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한국인의 일생’을 조근조근 풀어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맵짜다’라는 성질이다. 시련과 고난은 물론, 그 속에서 얻어지는 지혜와 역량까지를 지은이는 ‘맵짬’이라는 표현에 담는다.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는 탄생의 순간은 ‘좁은 굴속의 대모험’으로 묘사된다. “고통은 바로 생의 통로라는 것, 삶이 거쳐간다기보다 삶이 마땅히 이겨나갈 절대의 길목이라는 것”을 이 구절은 상징한다.

그렇게 시작된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맵짬’이라는 성질과 더불어 간다. “그들 삶이 끈질기듯이 그들 죽음 또한 끈질기다. 맵짜다. 한국인의 죽음을 상징하는 색은 거무튀튀가 아니다. 파랗다. 새파랗다.”

죽음에 대한 이런 적극적 의미 부여는 필생에 걸친 맵짠 시련과 고난이 한국인을 정화하고 갱신케 해 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소금에 간 맞춰진 배추나 무가 익은 김치 같이 다시금 싱싱해지는 과정처럼 한국인은 맵짠 시련을 통해 “갱(更)소녀하고 또 갱소년”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뒤집어쓰는 소금 간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들일까.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버텼던 웅녀 이야기에서부터 시련은 시작된다. 자식을 얻고 싶은 여인들이 단단한 바위 표면을 딱딱한 돌로 문질러서 구멍이 나게 했다는 ‘아기 빌이’의 의식은 우리네 어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또 다른 아픔을 대변한다. 그러나 여성의 오줌이 온 세상을 덮었다는 ‘선류 일국 전설’은 세상의 근원으로서 여성의 주도적 역할을 나타낸다. 자라는 사내 아이가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들돌 들기’ 이야기, 그리고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이 오리 입부리를 지니고 태어났다가 그 부리(=음순의 상징)를 잘라냈다는 <삼국유사>의 전승은 각각 남자와 여자가 성장 과정에서 거치는 맵짠 시련을 상징한다.

생의 축복이요 존재의 자기확인이라 할 사랑조차도 맵짠 시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때로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안기기도 한다. 경북 영양 일월산 기슭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보라. 혼인잔치 직후 신랑에게 버림받은 신부가 첫날밤의 녹의홍상 차림 그대로 앉아 죽었다는 이 이야기를 세 사람의 시인이 조금씩 다르게 변주해 놓았다. 조지훈의 <석문(石門)>과 서정주의 <신부>, 그리고 박목월의 <전설>은 설화가 문학으로 몸을 바꾸는 양상, 그 과정에서 시인 각자의 미묘한 개성이 발휘되는 대목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 전설에서 사랑은 마침내 죽음과 손을 잡았거니와, 삶의 종착점이자 자서전의 종장이 죽음에 바쳐진대서 이상할 것은 없는 노릇. 두 돌이 채 못 되어 죽은 아이를 번데기 모양 거죽에 둘둘 말아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고 우화(羽化) 또는 부화(孵化)를, 그러니까 부활을 빌었다는 ‘번데기 무덤’ 전설이 가슴 아프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소월의 시에서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랍동생을/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접동새로 환생해 밤새 울었다는 이야기에서도 미완의 삶을 죽음 이후의 몫으로 넘기려는 겨레 특유의 맵짠 사생관이 작동하고 있음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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