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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잊혀질 기억을 향한 사무침

등록 2006-05-11 21:26수정 2006-05-12 17:18

최정례 시집 <레바논 감정>
최정례 시집 <레바논 감정>
“폭탄 구멍 뚫린 집을 배경으로/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오락가락 갈매기처럼/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그의 시에서 기억은 왜곡되고 정체성은 혼돈에 빠진다
죽음·망각 상대로 한 싸움…그래도 시는 ‘난폭한 희망’의 확인
최정례(51)씨의 네 번째 시집 <레바논 감정>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레바논에서?//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레바논 감정> 부분)

“유리 어항에 금붕어가 살랑이듯/잠깐 서성였는데//수십 년을 거기서 살았다고 한다/남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아들도 아니었을 그와//창밖에서 이파리처럼/누군가/손을 흔들고 있었는데/잠깐 반짝였는데”(<잠깐 반짝였는데> 부분)

최정례씨의 시들에서 기억이 왜곡되고 정체성이 혼돈에 빠지는 양상들은 주목된다. 최정례 시의 주체들은 조각난 기억을 붙안고 구부러진 시간 속을 부유한다. 그런 상황이 그들의 안정된 정체성을 훼손함은 물론이다. 단정하고 질서정연한 시간의 흐름 속에 온전히 보존된 기억이 정체성의 유지에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최정례씨의 시들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고 현실과 몽상이 몸을 섞으면서 일관되고 신뢰할 만한 주체의 정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도대체 왜 그래야 할까/헛손질만 하다가 말듯이//대접만 한 모란이 소리 없이 피어나/순한 짐승의 눈처럼 꽃술 몇 번 껌벅이다가/떨어져 누운 날/언젠가도 꼭 이날 같았다는 생각/한다 해도/그게 언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고”(<껌벅이다가> 부분)

시적 주체는 ‘알 수 없고’ ‘모르겠다’

“어느 날 보니 나는 멀리도 흘러왔겠지요 말똥구리 소똥구리 말똥을 굴리며 엎어지며 고꾸라지며 들판을 건너가고 불 켠 차들이 요란하게 흘러가는 거리를 지나가고 있겠지요 가쁜 숨을 내쉬다 검은 눈을 껌뻑거리다 이내 눈을 감겠지요 달리는 구급차 속에서 어딘가로 가기는 가는데 큰 강에 이르기도 전에 세상에 찔레 덤불 기억조차 없고 이따금 자잘한 꽃잎 떠내려오지만 아무것도 모르겠고 따끔따끔한 이것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고”(<찔레 가시덤불> 부분)

인용한 두 시에서 시적 주체는 둘 다 “모르겠고” “알 수가 없”다는 불가지의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의 시에서 주체가 모르겠다는 것은 일종의 불확실한 기시감(데자뷰)을 뜻하는 반면, 뒤의 시에서 주체가 알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을 앞둔 이가 앞당겨 경험하는 ‘기억의 죽음’으로서의 망각에 해당한다. 두 번째 인용 시 <찔레 가시덤불>의 앞부분은 ‘나’가 어느 날 멀리 흘러오기 전, “찔레 덤불 기억”이 아직 진행 중인 현실인 무렵을 얘기한다.

“내가 당신의 가시에 오래 찔리고 있었다는 걸 전해야 하나 어쩌나 그러다가 흘러갔지요 그러다가 당신의 눈 당신의 귀 당신의 이마 온통 찔레 가시덤불인 채로 두고”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집 뒷표지에 적힌 시인의 산문을 참조할 만하다. 이 글은 말하자면 시인이 자신의 시 세계를 산문으로 쉽게 풀어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죽은 당신이 깨어나 내 노래에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을 것이다. 가버린 시간이 거슬러 흐르다 탑이 될 수 있으리라고도 믿지 못한다. 어느 날 시간은 나에게 대항하여 칼을 휘두를 것이다. 나는 결국 고꾸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금 스쳐 지나는 것들을 향한 내 사무침이 내 속에서 그치지 않기를, 가버린 것들을 향한 이 무모한 집착도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으로 잇대어지기를, 그 모두가 다시 일어나 새로운 시작의 힘이 되기를 기다린다.”

죽음은 사랑·희망의 역설적인 동력

그러니까 시인은 시방 죽음과 망각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버린 것들을 향한 집착, 그리고 스쳐 지나는 것들을 향한 사무침은 결국 잊혀지고 소멸할 것들에 대한 안쓰러운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 아닌 다른 사람만이 살고 있던 거리로 그와 나 사이에 사무쳤던 거리로 내가 닥지닥지 꽃을 피워놓고 꼼짝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리로 막 달아나고 싶었던 거리로 그와 나 사이 절해고도의 그곳으로”(<달려가는 꽃나무 - 이상의 ‘꽃나무’를 위하여>) 달려가고자 하며, ‘옛날 사진 합성! 훼손 사진 복원!’이라는 말을, 그것이 비록 사기꾼의 밀어라 할지라도,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옛날 사진 합성! 훼손 사진 복원!이라는 말/찢어진 사랑도 감쪽같이 기워줄 듯한 그 말//(…)//영정 사진도 훼손 사진도/그곳에 벗어두면/햇살 속 먼지의 꿈속에서/깨어나 춤추게 되는 거니?//목덜미에 아양 떨며 파고드는 햇살아/뿌리칠 수 없는 이 사기꾼의 밀어들아”(<햇살 스튜디오> 부분)

최정례씨의 시집에서 육친의 죽음이 고통스럽게 반추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죽음이 반드시 부정적이고 회피하고 싶은 사태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또한 중요하다. 종교적 초월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죽음이라는 실체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사랑과 희망의 역설적인 동력이 된다는 복합적인 인식이 최정례 시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것이다.

“활짝 핀 다음에야 나도 진다/지기 위해 만개했었다//목적도 없는 왕/네 안의 눈보라 속에서/쉬었다가 다시 피어나고/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첩첩의 꽃이라 하는 순간/끝, 종을 치는구나”(<첩첩의 꽃> 부분)

“겨자씨 속엔 눈 폭풍이/뻐꾹 소리 속엔 먼 산이//온몸을 잊으려고/이 세상 냄새를 잊으려고//눈꺼풀 속으로 백일몽 속으로/절벽 아래로 벚꽃 잎 아래로/흩날리네 흩날리네”(<온몸을 잊으려고> 부분)

예의 시집 뒷표지 산문에서 시인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그래도 백지 위에 닻을 내릴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시집 속에는 “희망은 난폭해서/날마다 쫓기며 가보게 한다”(<길에 누운 화살표>)는 구절도 있다.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이 바로 ‘난폭한 희망’을 확인하는 일이 되겠거니와, 시집 맨 마지막에 실린 <개구리 메뚜기 말똥구리야>는 온갖 불리한 정황 속에서도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치사한 희망 놀음을 노래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시 <찔레 가시덤불>에 나왔던 말똥구리(소똥구리)가 여기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을 새겨 보자.

“빚 갚고 갚으며/철조망에 싹이 나고 잎이 날 때까지/꽃 피고 꽃 지고/밤나무에 주렁주렁 수박 덩이가 매달릴 때까지/복사씨도 살구씨도 미쳐 날뛸 때까지/가자/말똥을 굴리며 굴리며//으으 개구리 메뚜기 말똥구리야/세간에 세간에 출세 간에/그 너머로 우리/말똥을 소똥을 굴리며 가자”(<개구리 메뚜기 말똥구리야> 부분)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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