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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펜 끝서 살아 숨쉬는 솜털 하나 잎맥 하나

등록 2006-05-15 21:37

수백장 찍은 사진 바탕으로 231점 그려
일흔 바라보며 15년은 붓 더 잡아야
[이사람] ‘우리식물 세밀화 대도감’ 펴낸 송훈 화백

“미쳐서 살았어요. 200점부터 가속도가 붙더군요. 그림이 그림을 그렸다고 할까요.” 13일 명륜동 화실에서 만난 송훈(67) 화백은 50대처럼 보인다. 전날도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강화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만 자라는 매화마름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수백장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세밀화를 그린다. 꽃, 잎, 줄기, 뿌리 그리고 열매. 매화마름 꽃은 지름이 1㎝가 될까말까. 1.2/1.2 시력의 그도 그러한 그림을 그릴 때는 돋보기를 써야 한다.

11년 동안 그린 한국 자생식물 세밀화가 300종 450점. 그 가운데 231점을 480쪽 두툼한 〈우리식물 세밀화 대도감〉(책임감수 이병윤, 현암사 펴냄, 15만원)으로 묶어 냈다. 한장한장 넘겨보면 무슨 풀인지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 그냥 행복하다. 왜일까. 앙증맞고 소박한 우리풀 우리꽃의 속성과 은은하고 고상한 동양화의 아름다움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탓이다. “신륵사의 200년 된 단청을 생각했어요. 세월이 밴 색깔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알고보니 석채더군요.” 그뿐이라면 모를까. 카메라 렌즈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는 식물의 잎맥 하나 솜털 하나까지 생생하다. 동양화 작품인 동시에 기록화인 까닭.

송 화백은 옷섶을 헤치고 가슴을 보여주었다. 2년 전 관상동맥 수술을 하면서 열고 닫았던 흔적이 뚜렷하다.

“목숨 걸고 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선 하나를 제대로 긋기 위해서는 사격선수처럼 숨을 멈춰야 한다. 호흡이 짧은 사람은 해낼 수 없다. 술은 원래 안 받거니와 하루 50개비를 피던 담배도 끊었다. 하지만 심장에 부담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같은 화실을 쓰는 김광배(73) 화백은 지금도 ‘일필휘지 그림’을 그리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송 화백은 이제 세밀화의 참맛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팔자소관이다. 송 화백이 세밀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50여년 전. 김태형 선생 등 다섯 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교과서, 위인전기 등 삽화를 무던히도 그렸다. 1975년 한국동식물도감 양서류·파충류, 담수조류·해조류 편 삽화도 그의 작품이다. 지름 1㎜ 원안에 또다른 원 다섯 개를 그려넣을 정도의 정밀함이 요구되는 동네다. 그리고 미인도를 그리면서 전통 한국화에도 빠져들었다. 이 모든 것이 식물 세밀화와 만남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셈이다. 출판인 형난옥씨가 “위대한 유산이 될 것”이라며 집요하게 설득하고, 아내가 “당신의 가장 돋보이는 분야”라고 부추겨 우리풀 우리꽃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몇달은 손이 말을 안 들었지만 이내 익숙해졌고 더불어 야생화의 매력에 흠뻑 매료되었다.

“참 감사해요. 뒤늦게 제자리를 찾았으니까요.” 세밀화는 예순을 넘기면 못 그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벌써 7년을 넘겼다. 아직도 마음은 40대다.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면 못 그릴 겁니다. 실제로 젊게 살려고 노력해요.” 갈 길은 멀다. 800~1000종의 자생식물 가운데 300종을 그렸으니 남은 게 많다. 앞으로 15년 이상은 붓을 잡아야 한다는 계산이다.

화실 벽에는 작업중인 작품이 넉 점이나 걸려 있다. 그 가운데 녹차나무는 넉달째 매달려 있다. 4년 전부터 그린다고 한 게 이제야 모양을 갖췄지만 언제 완성될지 모른다.

그는 색상이 영구불변이라는 아크릴, 천년 간다는 코튼지를 쓴다. 지금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20년쯤 뒤에는 진가가 알려질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다만 그때까지 눈과 손이 잘 버텨줄지, 그려야 할 식물이 점점 멀리 존재한다는 사실, 거기다가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한테 제주도나 백두산행은 고역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로트링펜이 대들보처럼 보이는 한에는….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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