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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쓰디쓴 세월의 더께 어머니 냄샌겨

등록 2006-05-18 20:15수정 2006-05-19 16:47

문순태 소설집 <울타리>
문순태 소설집 <울타리>
“쿠리한 된장 냄새, 시지근한 땀 냄새, 어머니 냄새가 달라졌다
그것은 팔십 평생 동안 곰 삭은 삶의 냄새”
문순태 소설의 뿌리는 ‘어머니의 강인한 생명력’
보도연맹·월북 등 역사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또다른 축
광주의 작가 문순태(65)씨가 아홉 번째 소설집 <울타리>(이룸)를 펴냈다. 2002년의 <된장> 이후 4년 만이다.

책에는 중편 둘과 단편 일곱이 묶였는데, 늙은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 <은행나무 아래서> <느티나무와 어머니> 등 앞쪽에 배치된 세 단편이 나란히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다.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는 팔순 노모에게서 풍기는 악취를 소재 삼았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냄새가 너무 좋아 잠시도 떨어져 있기가 싫었”던 ‘나’였지만, 이제 “내 코에 어머니의 냄새는 오래된 신 김치에서 나는 군내 같기도 하고, 쿠리한 된장 냄새, 시지근한 땀 냄새, 고리착지근한 발가락 고린내, 생고등어 비린내, 시금털털, 고리탑탑, 쓰고 시고 짜고 매운 냄새 등이 적당한 비율로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서 나는 이런 냄새를 못마땅해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에미한테서 나는 냄새는 에미가 자식 놈들을 위해서 알탕갈탕 살아온, 길고도 쓰디쓴 세월의 냄샌겨.”

문순태 산문집 <꿈>
문순태 산문집 <꿈>
그 냄새의 출처는 어머니의 반닫이 속에 보관되어 있던 색 바랜 무명천 보따리 속의 물건들인 것으로 밝혀진다. 녹슨 호미와 오래된 손저울, 함석 젓 주걱, 판자로 짠 손때 묻은 되, 때에 전 돈주머니, 나일론 머플러, 땟국에 전 앞치마 따위들. 거기에다가 네 귀퉁이가 닳고 빛이 바랜 외상 장부까지가 더해져 새삼스레 일깨워 주는 것은 어머니가 도붓장사를 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던 지난 시절이다. 이제 장성한 아들이 맡았던 역겨운 냄새와 어머니가 역설하던 세월의 냄새는 하나의 종합을 이룬다: “그것은 어머니가 살아온 신산한 세월이 발효하면서 풍겨져 나온 짙은 사람의 향기였다. 고통스러웠던 긴 세월의 더께 같은 것. 어머니의 냄새는 팔십 평생 동안 푹 곰삭은 삶의 냄새이며, 희로애락의 기나긴 시간에 의해 분해되는 유기체의 냄새가 분명했다.”

<은행나무 아래서>에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웠던 세월의 한 자락을 회고하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하늘에서는 뙤약볕이 이글이글 내리쬐고 땅에서는 뜨거운 지열이 푹푹 솟구치는 한여름에 비석거리 콩밭을 매고 있었는디, 아 클씨 뽀짝 눈앞 당산나무 그늘에서 느그 아부지랑 난초 년이 덩더궁 덩더궁 북장고 쳐 감시로 노래를 부르고 자빠졌지 않겄냐. 어찌나 천불이 나던지 참다 참다가 호맹이를 치켜들고 맨발로 헐레벌떡 당산으로 뛰어갔는디….”

“그만 쓰려해도 결국 역사 속으로”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아내가 힘들게 일하는 눈앞에서 첩과 어울려 노래 부르며 신선 놀음을 즐기던 아버지는 그에 대해 항의하러 온 어머니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마구 짓밟는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했을까. “콩밭이고 지랄이고 나 몰라라 허고 머리 싸매고 누워 있다가, 다음 날에 다시 눈 질끈 감고 콩밭을 맸제. 그 후로는 느그 아부지 난초 년이랑 북장구 치건 말건 눈감고 귀 막음시로 낮에는 뙤약볕에서 억척스럽게 콩밭만 매고 밤이면 새벽꺼정 길쌈을 했단다.”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에서, 화분의 꽃을 뽑고 대신 가지와 고추 모종을 심었던 일화와 함께 <은행나무 아래서>의 ‘콩밭과 북장구 사건’은 작가 어머니의 경험을 그대로 소설로 옮긴 것이다. 소설집 출간에 맞추어 서울에 온 작가 문씨는 “가장 궁핍하고 고통스러운 시련의 한복판에서 가족들을 건사했던 어머니의 강인한 생명력이 바로 내 소설의 뿌리에 해당한다”며 “저출산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머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소설집 <울타리>의 또 다른 축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다. 작가는 미완의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이라든가 <징소리> <철쭉제> <그들의 새벽> 같은 작품들에서 줄기차게 역사와 현실을 상대로 대결을 펼쳐 왔다. “이제 역사적인 소재는 그만 다루려 해도 쓰다 보면 결국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작가는 말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두 중편 <울타리>와 <감로탱화>는 전쟁 당시의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월북 및 탈북 등 묵직한 소재를 건드린다. 우선 작가 스스로 “역점을 둔 작품”이라 말한 표제작 <울타리>를 보자. 기자인 ‘나’가 취재 대상으로서 만나는 두 노인이 있다. 탈북자 김기두와 비전향 장기수 최동수가 그들이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어린 시절 고향 친구이자 나란히 소년 빨치산이 되었다가 함께 월북했던 사이였다. 그 시절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한 사람은 먹을 것을 찾아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고 다른 한 사람은 이념을 좇아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고자 한다. 극단적으로 갈리는 두 사람의 행로를 지켜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이들 모두는 경계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삶과 죽음의 경계, 갈등과 이념의 경계, 암컷과 수컷의 경계,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 생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감로탱화>는 우연한 계기에 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자들의 유골을 발견하면서 삶의 경로가 바뀌게 된 고교 졸업반 학생들을 등장시킨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고 싶”어서 유골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세상에 공표한 이들의 행위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천도해 주기 위해 감로탱화에 매달리는 스님의 그림 작업과 같은 궤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8월 정년퇴임…고향서 글쓰기 전념

그리고, 짧고 이색적인 단편 <영웅전>에서 작가는 결국 ‘5월 광주’를 재론한다. 소설은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게 했음에도 참회하거나 깨우친 것 같지가 않”은 전직 대통령을 ‘당신’이라 부르며, 그의 행적과 임진왜란 때 제대로 된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을 비교하면서 5월 광주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역설한다. 작가는 “5월이 되고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광주 사람들은 일종의 집단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로 5월 광주의 아픔과 슬픔이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작가는 오는 8월 대학에서 정년퇴임하게 된다. 소설집과 함께 세 번째 산문집 <꿈>을 낸 것은 이 일을 기념하는 의미도 지니는 셈이다. “정년 이후에는 고향 담양에 마련한 집에 내려가 글쓰기에 전념하면서 지역 문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문학의 집’을 꾸려 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7권으로 중단된 상태인 <타오르는 강>을 3권 정도 더 써서 완성하는 게 당장의 숙제입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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