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인간일까?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정주연 옮김.
아카넷 펴냄. 1만2000원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정주연 옮김.
아카넷 펴냄. 1만2000원
도구 활용 침팬지보다 나은가? 언어 소통은 사람만이 한다고?
인간이란 정의 다시 내려 동물들과 평화적 공존 지혜 얻자
인간이란 정의 다시 내려 동물들과 평화적 공존 지혜 얻자
‘그래, 넌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So You Think You’re Human?) 원제는 이처럼 다소 도발적이다. 도발적이지 않다면, 당혹스럽다.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아카넷 펴냄)라는 번역본의 제목은 원제를 상당히 점잖게 누그러뜨린 셈이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 그러니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향해 질책하듯 던지는 말은 아니다(아니, 사실은 그런 질책의 뜻을 담은 질문인 것일까).
런던대 지리학 교수인 역사가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가 쓴 이 책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정의와 범주, 그 정합성과 타당성을 따져 묻고자 한다. ‘인간’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종다기하겠지만, 역사학자인 지은이가 동원하는 방법론은 역시 역사적 접근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그 타당성과 설득력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거나, 자기가 혹시라도 인간 아닌 다른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해 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라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자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의 진술일 터이다. 그런데도 지은이는 왜 새삼스럽게 인간의 정의를 문제 삼고 나섰는가. 자명한 것 속에 함정이 있으며, 자명한 것이 왜 자명한지를 따져 묻는 것이야말로 진정 학문적 태도임을 그가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에 깔고 그는 인간에 관한 역사적 정의의 타당성을 점검한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전통적인 요소 중 대표적인 것으로 도구와 언어, 문화 등이 있다. 그러나 영장류 동물학의 최근 연구 성과들은 이런 특징들이 인간만의 몫이 아님을 속속 밝혀 내고 있다. 침팬지가 나뭇가지를 개미집에 집어 넣어 거기에 달라 붙은 개미를 떼어 먹는 유명한 사례는 제인 구달의 선구적 연구 덕택에 보편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단한 나무 열매를 쪼개기 위해 두 개의 돌을 이용하는 원숭이는 물론, 조개 껍질을 깨기 위해 돌을 이용하는 수달을 보더라도 도구 사용에 관한 인간의 독점권은 인정하기 어렵다.
‘물질문명’ 네안데르탈인 복권 주장
언어 역시 인간만의 몫으로 주장하기 어렵다. 벌·개미와 돌고래, 박쥐 등의 고유한 의사전달체계는 인간과 다른 방식의 ‘언어’로 볼 수 있으며, 영장류들을 훈련시켜 얻은 결과는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습득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말을 알아듣는 개와 앵무새의 사례 역시 참조할 만하다.
언어와 도구가 아닌 ‘문화’라는 고급스러운 현상으로써 인간의 고유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려 할 때 수컷 침팬지들이 모여 똑같은 방식으로 몸을 흔들고 발을 구르는 ‘비 춤’의 사례 보고라든가, 죽은 토끼나 바퀴벌레를 종일 머리에 얹어 두고 만족스러워하는 암컷 보노보들의 행위는 영장류들에게도 나름의 문화가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 된다. 일본 코시마 섬의 짧은꼬리원숭이 집단에서 목격된 행동의 혁신과 보편화 과정은 특히 놀랍다. 관찰자들이 ‘이모’라는 이름을 붙인 천재 암컷 원숭이가 농부에게서 얻은 고구마를 개울물에 헹구어 흙을 씻어 내고 먹기 시작하자 그 방법은 이내 다른 동료 원숭이들에게 확산되었다. 이모는 또 인간들이 해변에 뿌려 주는 밀에 모래가 묻어 먹기에 힘들자 밀과 모래를 함께 물에 뿌리고는 물 위에 떠오르는 밀만을 건져 먹는 방법을 개발해서 역시 무리들에게 전파시켰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지은이는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일종의 ‘복권’을 주창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현생 인류의 조상과 상당 기간 동안 공존하다가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물질문명을 이루었으며 죽은 이를 매장하고 그 위에 꽃을 뿌리는 식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의 조상에 비해 여러 모로 열등했다는 주장을 하며 그에 어울리는 증거를 찾기에 열을 올린다. 지은이는 이런 태도에서 흑인을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적 존재’로 보고자 했던 19세기 인종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과거에 인간과 사실상 구분되지 않는 인간 아닌 종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것이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게다가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의 불가피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웃 동물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
그러나 그 변화는 그야말로 ‘인간적 가치라는 신화’를 보존하고 확산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 지은이의 간곡한 제언이다. 그야말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서 기왕의 인간 개념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인간적 겸손와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 ‘이웃 동물’들의 권리와 행복 역시 침해하지 않는 평화적 공존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다. 가령 동물들 역시 자기 영역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잡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무언가를 빼앗기는 실험을 당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권리를 지닌다는 동물 권리운동가들의 주장에도 새겨 들을 바가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것이며 다른 모든 생명을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하거나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인간 중심주의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 개념의 경계는 분명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 개념은 아직도 놀랄 만큼 확장될 여지가 있다”는 지은이의 결론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이같은 염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영국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을 각색한 1932년 영화 <모로 박사의 섬>의 한 장면. 인조 인간을 만들려는 과학자의 시도를 소재로 삼은 이 소설·영화는 인간의 정의와 범주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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