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안을 걷다
김병호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6000원
김병호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6000원
김병호(35)씨의 첫 시집 <달 안을 걷다>(천년의시작)는 인상적인 출발이라 할 만하다. 50편의 시가 3부로 나뉘어 실린 시집에서 제1부에 실린 18편의 시는 특히 높은 밀도와 상징의 배치로 하여 도두보인다. 유년기의 풍경을 신화적 필치로 그린 시들에는 아버지와 숲과 강과 우물이 등장하여 모호하지만 풍요로운 울림을 낳는다.
“불탄 묵시록 같은 검은 숲을 지나/비로소 닿은 지평선의 투명한 밤/아비의 주검을 불사른 아이들은/자정의 태양마저 훔치고 싶어했다//(…)//아버지는, 마술사였다/겨드랑이 밑에서 털 빠진 비둘기를 꺼내거나/혀 밑에 숨겨둔 불꽃으로 파도를 만들거나/거웃도 없는 성기로 꽃을 만들어 주었다/하지만 꽃 된 적 없는 아버지/한번도 시들지 못한 아버지/걸음을 옮길 때마다, 죽은 새의 깃털이/아버지의 발자국을 메우고/아버지는 주문처럼 지워져갔다”(<청맹과니 마술사> 부분)
김병호씨의 시들에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하릴없이 지워져 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아버지의 성에서 죽은 짐승들의 피가 흐르고/어둠만이 문이 되는 아버지의 땅”(<아버지의 화원>)은 지독한 묵시록적 비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뜻밖에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런 점이 선배 시인 이성복씨와 구분되는 점이겠거니와, 시인에게 아버지는 시인 자신을 거쳐 아이에게로 이어지는 유전자의 전생(前生)으로 파악된다.
“오래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강가의 묘석> 부분)
“아버지는 어둠을 낳고/어둠은 우물에 뿌리를 묻어/밤하늘, 수문 여는 소리만 가득하다”(<어둠은 우물에 뿌리를 묻는다> 부분)
그러니까 김병호씨의 시들에서 어둠과 죽음은, 통상의 용법과는 달리, 부정적인 의미망을 거느리지는 않는다. 이 점은 할아버지의 죽음과 시인 자신의 성장을 한 줄에 꿴 그의 등단작에서 어둠이 안온한 품처럼 그려졌던 것과 통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금줄 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대문에서 토방으로/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별자리처럼 빛납니다/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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