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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대숲 언저리 ‘아픔 공화국’

등록 2006-06-01 22:09수정 2006-06-02 16:48

손택수 두 번째 시집 <목련 전차>
손택수 두 번째 시집 <목련 전차>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전통 서정시의 계승’
시 전문 계간지 <시작> 여름호는 ‘‘다른 미래’를 꿈꾸고 사유하는 젊은 시인’이라는 이름의 특집을 마련했다. 고영민 길상호 박성우 신용목씨 등 18명의 신작시를 싣고 평론가 여덟 사람의 평을 곁들인 야심찬 기획이다. 평론가 권혁웅씨가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린, 엽기적이고 자폐적이며 무의식과 욕망의 표출에 치중하는 젊은 시인들과 변별되는, 서정시의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현실과의 접점을 잃지 않는 또래 시인들을 집중 조명한다는 취지였다.

이 특집에 손택수(36) 시인 역시 포함되었다. 그의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2003)을 대상으로 한 글에서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선태씨는 손택수 시가 고향 담양의 대숲에서 빚어져 나왔음을 지적했다.

<목련 전차>(창비)는 손택수씨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과 마찬가지로 고향과 가족에 연원을 두고 있으면서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을 향해 더욱 넓고 깊어진 시선을 만날 수 있다.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강이 날아오른다> 전문)

시집 맨 앞에 배치된 이 시에서 강과 아낙과 물새는 똑같이 한자 ‘을(乙)’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얼핏 여유롭게 흘러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양은 실은 아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은 관찰하는 이를 끌어당기는 흡인력을 지녔다. 시인은 ‘까딱하면 뛰어들겠다’고 쓰고 있지만, 그는 시를 씀으로써 이미 뛰어든 것이다. 강과 아낙과 물새의 아픔과 울음 속으로. 시란 그런 것이니까.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기. 왜냐하면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비범한, 시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첫 시집처럼 고향 담양이 ‘연원’


“상할머니의 몸은 천문을 품고 있었던 게지/내가 알지 못할 예감으로 떨리는 우듬지 끝/떨어져내리는 잎사귀 잎사귀마다/빛나는 통증으로 하늘과 이어져 있었던 게지//쿠르릉 밤늦게 저린 다리를 끌며 일어난 어머니 빨래를 걷는다/서러운 몸속에서 몸속으로 구름이 유전하고 있다”(<구름의 가계> 부분)

강과 물새의 성(性)은 알 바가 없다. 아픔의 공화국에 거주하는 사람 주민들의 성에 주목한다. 아낙과 상할머니와 어머니는 모두 여성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아픔, 그들의 빛나는 통증, 천문(天文)을 읽을 수 있는 특출난 능력이 “땀 뻘뻘 생의 뻘구멍”(<꽃낙지>)을 통과해 온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할 때 구멍이란 통증을 통찰로 형질변화시키는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구멍을 여성의 상징으로 드는 것이 반드시 비속한 상상력의 작동만은 아니다. 열려 있어서 만물을 흔쾌히 통과시키는 구멍의 너그러운 생리는 수용성과 내성(耐性)이라는 여성의 성정을 닮았다. 구멍은 호흡이며 생명이고 화엄이다.

“스윽, 제비 한마리가,/집을 관통했다//(…)//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그야말로 무방비로/앞뒤로 뻥/뚫려버린 순간,//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방심> 부분)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절집 기둥 기둥마다/처마 처마마다/얼금 송송/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환하게 뚫려 있구나”(<화엄 일박> 부분)

여성을 닮은 ‘구멍’의 상징성

<방심>은 여름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땀을 식히던 순간 제비 한 마리가 그 두 개의 문을 통과해 지나간 일을 읊고 있다. 제비가 알려준-알려주었다기보다는 만들어낸 구멍은 보는 이의 숨구멍까지 활짝 열어젖히는 구실을 한다. 살림의 구멍이다. 구멍의 이런 작용을 발효에 견줄 수도 있겠다.

“절집 처마 아래 메주가 마른다//(…)//겨울 햇살과 바람과 먼지와 눈 내리는 소리까지//눈 속에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 산짐승 울음까지//몸속에 두루 빨아들여 피워내는 메주 곰팡이//나무아미타불, 자연 발효시킨 부처님이시다”(<메주불(佛)> 부분)

절집의 부엌 살림을 맡아하는 보살님은 메주에게 염불을 들려주고, 그 아래 합장을 한다. 살림과 모심이다. 여자의 일. 여자를 가사노동에 묶어 두려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거룩하고 갸륵하다는 뜻.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 있었던가”(<달과 토성의 파종법>)라고 쓸 때 시인은 우주와 교감하는 할머니=여자의 능력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감과 감응의 능력이 반드시 여자의 독점물일 필요는 없다.

“별이 지상에 내리는 걸 저어하지 않도록/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잠자리에 드는 마을”(<별빛보호지구> 부분)

“드센 파도가 아직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가슴을 졸일 사람이 있겠구나/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장생포 우체국> 부분)

별빛은 마을 사람들이 드리워 놓은 어둠을 발판 삼아 지상에 내려온다. 바다에서 막 돌아온 사내의 필체는 바다의 기운을 닮아 있다. 사람과 세계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한 몸처럼 호흡한다. 동기감응(同氣感應).

시집에는 물론 아물리지 않는 고통과 분노도 있다. 하필 추석날을 골라 술 취한 사내들을 몸으로 받아야 했던 ‘김양’(<추석달>), 그리고 “주도면밀한 강간범처럼/벌겋게 달아오른 총열에 덮어씌운 콘돔/(…)/시엔엔(CNN)을 타고 생중계되는 미국식 포르노”(<콘돔 전쟁>)에 대한 시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시집은 전체적으로 고향 담양의 대숲에서 비롯된 따뜻한 공감의 테두리 안에 놓여 있다. 손택수 시인이 동갑내기 문태준 시인과 함께 전통 서정시의 듬직한 계승자로 기대를 모으는 까닭이다.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이었다/그런 날이면 코 고는 소리에도 정든 가락이 실려 있었다”(<집장구> 부분)

“그러나 청둥오리떼 파다닥 멀어지기 직전, 오오 바로 그 직전 나는 잠시 청둥오리 몸속에 있다 청둥오리 몸속 가장 깊은 곳에 닿았다 떨어진다”(<청둥오리떼 파다닥 멀어지기 직전> 부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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