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도서평론가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바보예찬> 에라스무스 지음. 문경자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우연한 기회에 에라스무스의 삶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였으나, 종교개혁을 둘러싸고 양진영에서 동시에 ‘왕따’당해야 했던 비운의 인물.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으나 어처구니없게도 그 바퀴에 깔릴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의 상징. 지식인으로 누릴 수 있는 영광과 극적인 몰락을 겪었던 에라스무스의 삶은 의외로 낯익었다.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간 이 나라 지식인의 초상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에라스무스가 1509년 알프스 산맥을 넘으며 구상했다는 책이 바로 <바보예찬>이다. 한때 쏟아져 나왔던 사상전집에 흔히 모어의 <유토피아>와 함께 묶여 있었으니, 대체로 <광우예찬>이라 번역되었던 바로 그 책이다. 이번에 불문학자 문경자씨 번역으로 새롭게 나왔는데, 다시 읽어보며 에라스무스의 익살과 풍자정신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서문부터 말장난을 늘어놓는다. 장난삼아 우신(Moria)을 예찬하는 글을 지어볼까 하는데, 이유인즉슨 발음이 비슷한 모어의 라틴어 이름 ‘Morus’가 떠올랐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유독 정신노동자들만이 삶의 고달픔에서 벗어나 쉬지 못하는데, 이들을 위해 “하찮은 것들을 가지고 진지한 일에 도움이 되게”하는 재치를 부려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광대짓을 펼쳐보겠노라 예고하는 격이다.
먼저 익살부터 나온다. 여기에는 이른바 ‘눈에 콩깍지 씌였다’고 하는 경우에 드는 내용이 나온다. 우신이 대뜸 물어본다. 누구 덕택에 삶이 시작되었냐고. 그것은 권세 있는 아버지를 둔 팔라스의 창도 아니고, 구름을 불러모으는 유피테르의 방패도 아니다. 설혹 그가 스토아 학파 철학자라도 우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서는 아비가 될 수 없다. “어리석은 말을 지껄여대거나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해대”야 아비가 될 수 있어서다. 더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다. 우신의 하녀인 ‘경솔’이 없다면 결혼을 할 수 없을 터이고, ‘망각’이 없었더라면 어찌 여자가 고통을 마다하고 아이를 또 낳으려 할 것인가. 다 우신 덕택이라는 것이다.
<바보예찬>의 ‘눈’은 힘 있고 배운 것 많은 이들에게 던지는 표창 같은 풍자에 있다. “오직 미치광이들만이 남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진리를 말하는 특권”이 있는 법인데, 그 권리를 극대화하고 있는 셈이다. 풍자의 대상이 된 집단은 세 부류로 나뉜다. 문법학자, 시인, 법률학자, 신학자 같은 지식인이 앞자리에 놓여 있고, 군주, 궁정인 등속의 정치인도 나온다. 종교인으로는 교황, 추기경, 주교, 수도사, 신부 등이 한통속으로 묶여 있다. 입으로야 민중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들의 잇속만 챙기는 집단인 것이 날카롭게 드러난다. 신부를 예로 들자면, 낡은 양피지에서 민중들이 십일조는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조세를 내야한다는 내용은 용케 찾아낸다. 그러나 민중을 위해 종교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혀 있는 대목은 전혀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것은 현재적 가치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꼭지점에서 태어난 <바보예찬>도 마찬가지다. 익살과 풍자 정신이 품고 있는 가치를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역시 지난 암흑기를 익살과 풍자 정신으로 헤쳐나왔다. 오늘을 위기의 시대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그 정신으로 무장해야 할 터이다.
고전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것은 현재적 가치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꼭지점에서 태어난 <바보예찬>도 마찬가지다. 익살과 풍자 정신이 품고 있는 가치를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역시 지난 암흑기를 익살과 풍자 정신으로 헤쳐나왔다. 오늘을 위기의 시대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그 정신으로 무장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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