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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너는 여자? 아니 남자? 아 너는 사람

등록 2006-06-15 21:37수정 2006-06-16 15:03

바빌론 특급우편<br>
방현희 지음. 열림원 펴냄. 9500원
바빌론 특급우편
방현희 지음. 열림원 펴냄. 9500원
동성애·근친상간 같은 ‘통념 너머의 사랑’ 대상은 할아버지·여자·남자…
모두가 그저 사람의 사랑이라는 시선 성적 정체성 찾기를 신화와 몽환으로 그려내
장편소설 <달항아리 속 금동물고기>의 작가 방현희(42)씨가 첫 소설집 <바빌론 특급우편>(열림원)을 묶어 냈다. 2001년 등단작 <새홀리기>를 비롯해 10편의 단편이 묶였다.

방씨의 소설집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작가가 동성애와 근친상간 같은 ‘통념 너머의 사랑’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피를 나눈 가족이나 가까운 친족, 또는 생물학적 성이 같은 이들끼리의 사랑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불온한’ 사랑이다. 기존의 사회질서가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쪽에서는 다른 여러 금기와 더불어 이런 통념 너머의 사랑에 대한 금기 역시 기를 쓰고 관철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그런 금기에 맞서려는 시도는 상당한 저항과 탄압을 각오해야 하게 마련이다. 자연히, 그런 금기에의 도전을 그리는 소설은 자못 비장하고 때론 과격한 어조를 띠기 십상이다.

근친상간과 동성애를 그린 방현희씨의 소설이 그런 어조의 과잉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그가 그런 류의 소재를 즐겨 다룬다는 사실에 못지않게 주목해 마땅하다. 책 뒤에 해설을 쓴 김형중씨의 표현에 따르면 “방현희는 동성애를 어떠한 자의식 없이, 무심하게, 그저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려낸 한국 최초의 작가”에 해당한다. ‘최초’라는 수식이 엄밀한 고증을 거친 것인지는 다시 따져 봐야 하겠지만, 딱히 최초가 아니더라도 동성애와 근친상간을 대하는 방씨의 태도가 매우 범상하고 자연스럽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방씨의 동성애 소재 소설에 접근하는 출발점으로서 <붉은 이마 여자>가 유효해 보인다. “첫째 날./그녀는 막 태어났다”로 시작해 차례로 일곱째 날까지를 지나서는 ‘그리고 나머지 날’로 마무리되는 이 작품은 사뭇 몽환적이다. 막 태어난 ‘그녀’가 할아버지들, 진홍색 카펫을 짜는 여자, 그리고 젊은 남자를 차례로 만나 성적 열락을 맛보았다가는 헤어지면서 점차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신화적으로 그려진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 여자가 자신을 향해 묻고 스스로 답하는 대목에 이 작품의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 “너는 여자? 아니, 남자? 아, 너는 사람. 여자이고 남자이며 할아버지이기도 한 너는 사람.”

금기 도전 ‘어조’의 과잉 배제

요컨대 남자냐 여자냐 하는 식의 구분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 그런 구분 이전에 혹은 그 너머에 ‘다만 사람’이라는 좀 더 근본적인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자 한다.


<붉은 이마 여자>에서 신화적이며 상징적으로 그려진 동성애의 세계는 <연애의 재발견> <녹색원숭이> <13층, 수요일 오후 3시> 등의 작품에서는 구체적 상황과 인물이라는 육체를 입는다. <연애의 재발견>은 패션 디자이너인 남자주인공이 자신의 가게에 고용된 젊은 남자 모델을 사랑했다가 배신을 당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동성 애인을 만나기 전에 그에게는 이미 이성애의 상대자가 있었지만, 그에게 상대방이 여자냐 남자냐 하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남자 애인에 대한 사랑이 배신으로 귀결된 뒤 그의 생각을 빌려 작가가 “그 어떤 경험도 학습도 간섭하지 못하는 멍청하고 꽉 막힌 세계, 사랑이라는”이라고 쓸 때, 여기서의 사랑이 반드시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를 배제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녹색원숭이> 역시 남성 동성애를 다루고 있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숨어 있는 사랑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는 주인공의 생각은 <연애의 재발견>의 교훈을 떠오르게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무서움은 에이즈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조금 다른 맥락을 지닌다. 무용수인 주인공이 에이즈에 걸린 자신을 가리켜 “우리는 구역질나는 괴물이 아니라구”라고 독백할 때, 거기서는 에이즈 환자를 대하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항의와 분노보다는 부당한 운명 앞에 놓인 자의 슬픔과 체념이 더 크게 다가온다.

<13층, 수요일 오후 3시>는 기묘한 방식으로 여성 동성애를 다룬다. 주인공은 자신의 차에 치여 죽은 카페 여주인으로 행세하는 남자다. 안면이 있는 여주인은 피를 흘리고 죽어 가면서 ‘내 삶을 부탁해’라고 그에게 말했던 터였다. 어쨌든 여주인이 남긴 속옷과 겉옷을 입고 카페를 지키는 그의 앞에 수요일 오후 3시마다 나타나는 손님이 있다. ‘명’이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카페 여주인으로 변장한 그를 구석방으로 불러 섹스를 한다. 그런데 그 섹스는 이성 사이의 방식이 아니라 동성 간의 섹스처럼 이루어진다. 알고 보니 명과 카페 여주인은 이전에도 수요일 오후 3시면 구석방에서 섹스를 나누었던 것.

<13층, 수요일 오후 3시>에서 주인공 남자와 명의 성 역할이 뒤집혀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처음부터 명은 주인공 남자에게 반말을 하며 반대로 남자는 명에게 존대를 한다. “그 첫 번째 수요일에 정해진 그들의 우열은 지금껏 유지되고 있었다.” 또 섹스의 순간에 주인공 남자는 “비로소 여자가 된 듯 몸이 뒤틀렸다.” 이런 식의 성 역할 전도는 <연애의 재발견>에서 남자주인공과 이성 연인 사이의 관계에서도, 정도는 덜하지만, 나타난다. 요컨대 ‘사랑은 사랑일 뿐 이성애냐 동성애냐, 또는 남자냐 여자냐 하는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작가의 태도가 반영된 대목이라 하겠다.

오이디푸스이며 롯의 딸

소설집 표제작인 <바빌론 특급우편>은 말하자면 ‘<붉은 이마 여자>의 근친상간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신화적이며 모호하게 기술되는 이 소설은 “13년 전, 세상에 (어머니와 그)단둘밖에 없던 시간” “열기를 가누지 못하고 내달리던 수소인 그(가) 필연적으로 맨 처음 맞닥뜨린 암소를 덮쳤”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이 “자신은 오이디푸스이며 롯의 딸이며, 현대에 이르도록 은밀히 지속되어진 몹쓸 사랑의 희생자라는 것”을 되새길 때 작가는 이 금지된 사랑의 신화적?역사적 맥락과 그 현실적 함의에 아울러 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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