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지망생 시절 문학적 영감 행적 답사하며 ‘삼국유사’ 전도사
문화콘텐츠 가치 무궁무진 후학 위해 DB 만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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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일연을 묻는다> 쓴 고운기씨
“<삼국유사>의 지은이 일연 스님이 살았던 13세기는 밖으로는 몽골제국의 지배, 안으로는 무신정권의 지속이라는 환란의 시기였습니다. 제국주의 침탈과 전쟁, 군사독재에 시달린 20세기와 유사하죠.”
<일연을 묻는다>를 쓴 고운기(45·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씨는 <삼국유사>의 현재적 의미를 ‘민족의 자존에 대한 염려’에서 찾았다.
“숭유억불책을 썼던 탓도 있지만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 <삼국유사>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민족의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최남선 등을 중심으로 재조명과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나는 누구며 우리 민족은 누구이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삼국유사>는 훌륭한 지침서가 됩니다.”
지은이 고씨는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을 <삼국유사>에 대해 쓴 이후 <삼국유사> 번역본과 관련 논문집말고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길 위의 삼국유사> 등의 책을 잇따라 펴냈다. 가히 ‘<삼국유사> 전도사’라 이를 법하다. <일연을 묻는다>는 일연 스님의 생애를 그의 행적을 좇으며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삼국유사>가 지니는 의미를 찾아 보려는 책이다. 1206년에 태어나 1289년에 입적한 일연은 올해로 탄생 800년을 맞았다.
그가 처음 <삼국유사>에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거기 실린 일연 스님의 칠언절구 시 때문이었다. 서기 372년 승려 순도에 이어 374년 아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이야기를 적고 난 다음에 덧붙인 작품이다.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홀연히 들리는 노 젓는 소리, 깜짝 놀라 멀리 나네/어느 곳 고깃배인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마치 이미지즘의 시를 보는 것 같았어요. 범상한 봄 풍경을, 시인 쪽의 아무런 설명이나 개입 없이 그냥 그리면서도 그 안에 역사의 여명을 알리는 상징을 담은 솜씨가 놀라웠죠.”
<삼국유사>에 실린 일연 스님의 칠언절구 48수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그에게 문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구실했다. 그의 1983년 신춘문예 당선작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에 일연 스님의 영향이 들어 있다.
그가 파악하기로 <삼국유사>에 관한 연구논문과 저서, 번역본 등은 2500여 편에 이른다. 그런 가운데 그의 작업은 특히 현장 답사에 중점을 두는 점이 특징적이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쓰는 방식이 바로 현장을 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전라도 광주 무량사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서 출가했어요. 이 세 지점을 꼭짓점 삼은 삼각형에 스님의 행적이 집중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얘기들도 이 선상에 있는 것들이죠.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에 현장 답사는 필수적입니다.”
그의 <삼국유사> 현장 답사는 1988년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1990년께부터는 사진작가 양진(40)씨와 동행해서 글과 사진 사이의 유기적 관련성을 높일 수 있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와 <길 위의 삼국유사>에 이어 <일연을 묻는다> 역시 두 사람의 협업에서 탄생했다. 고운기씨는 “이제 남한에 있는 <삼국유사>와 일연의 현장은 거의 다 다녀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삼국유사>와 관련해 그가 할 일은 얼추 마무리된 것일까.
“<삼국유사>에 관련된 연구결과들은 규모도 방대하지만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후속 연구자들을 위해 그것들을 수집, 정리하고 나아가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삼국유사> 본문과 그 배경에 대한 주석작업은 계속해서 보완이 이루어져야죠. 문화 콘텐츠로서 <삼국유사>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겠지만, 개인적인 헌신과 희생 또한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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