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이상인 지음. 이제이북스 펴냄. 2만2000원
이상인 지음. 이제이북스 펴냄. 2만2000원
근대의 해석 전제하지 않고 고대문헌 자체 분석을 통한 플라톤 철학 제대로 보기
유럽철학의 전통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만큼 플라톤은 서양철학에서 중추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이제는 국내에도 제대로 된 플라톤 전집이 출간되고 여러 연구서가 나와야 할 것이다. 다행히 박종현 교수가 플라톤의 주요 대화편들의 역주서들을 내놓고 있고, 정암학당에서는 플라톤 전집을 5년 안에 출간할 계획을 세워 1차로 몇몇 번역본이 조만간 출간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번에는 연세대 이상인 교수가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이제이북스)이라는 연구서를 출간하니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이 책을 접하며 우선 지은이의 폭넓은 지적 섭렵에 부러움을 느낀다. 지은이는 이 책 속에서 플라톤을 중심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지만, 플라톤 말고도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신피타고라스주의, 헤겔, 히포크라테스 등을 논의에 끌어들이는 넓은 식견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1장 3절(헤겔의 역사 이해와 역사 해석)의 경우는 간결하게 처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전체의 흐름에는 기존의 플라톤 연구서들과 달리 눈에 띄는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지은이는 플라톤 철학을 비롯해 고대철학이 근대 이래로 소박한, 전근대적인 것으로 폄하되어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고 보고, 이에 강력하게 이의제기를 한다. ‘지나간 전통은 본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모태이다’라는 것이 지은이의 입장이다. 더욱이 지은이는 고대의 주제의식은 근대의 주제의식과 동등한 수준에서 경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지은이는 근대의 해석을 전제로 하지 않고 고대문헌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플라톤 철학의 정당한 위상을 정립하고자 한다.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은이는 우선 1장 ‘고대와 근대’를 통해 고대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근대에 어떻게 형성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2장 ‘지각과 이성’에서는 근대에 특히 데카르트와 칸트에 의해서 지각과 이성의 차이는 수용성과 자발성의 차이로 이해되며, 이런 이분법은 고대의 지각 이론을 해석하는 하나의 표준이 되어왔음을 지은이는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표준으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각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고대의 텍스트 자체의 분석을 통해 밝혀 보인다. 3장 ‘인식과 방법’에서는 ‘형이상학적 플라톤 해석’, 곧 플라톤을 초월적 이데아론자 혹은 두 세계론자로 정형화하는 해석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해석에 따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를 구분하는 전통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또한 두 세계론에 따른 의견과 인식의 구별 방식이나, 그에 기초한 상기설의 설명 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4장 ‘경험과 과학’에서는 고대에 철학의 탐구 방법이 수학이나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등의 개별과학들에 적용되고, 고대의 과학적 수준이 근대의 과학적 수준에 비해 엄밀성에서 결코 못하지 않음을 밝힌다. 5장 ‘개인과 국가’에서는 철학자들이 공동체의 발생과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역할을 연구함으로써, 당시 정치적 삶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관심을 충족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정치의 개혁에도 큰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지은이의 은사인 고전학자 아르보가스트 슈미트 교수가 장기간 수행하고 있는 “근대의 자기 이해와 고대의 해석”이라는 프로젝트의 영향 아래 구상하고 저술한 것이라고 지은이는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지은이는 유학 시절부터 줄곧 관심을 기울이며 마음속에 잉태해 온 것을 마침내 이번에 출산을 한 셈이다. 귀중한 연구 성과를 우리에게 내 놓아주었으니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다. 플라톤 철학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사람과 특히 철학사적 맥락에서 그의 사상을 조망해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기백/연세의대 의사학과 연구교수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낳을 만큼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림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중 플라톤(왼쪽)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한겨레> 자료사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