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그리다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주영 옮김. 아고라 펴냄. 1만2000원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주영 옮김. 아고라 펴냄. 1만2000원
칸트·괴테·모파상·릴케…유언과 주변 증언으로 재구성한 죽음의 순간들 우상이 된 그들의 진짜 얼굴
앙드레 지드는 “좋아”라고 했고, 에밀리 브론테는 “아니, 아니”라고 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어머니, 어머니”라고 했으며,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우리 둘이!”라고 외쳤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조금만 더 들어보자. 기 드 모파상은 “어두워, 아! 어두워”라 말했고, 괴테의 말은 “좀 더 많은 빛을”이었다. 이 정도면 짐작들 하셨으리라. 그럼에도 여전히 헤매는 분들을 위해 마지막, 결정적인 힌트. 하인리히 하이네는 “난 사라져버렸어”라는 말을 반복했고, 조르주 상드는 “죽음, 죽음”을 되뇌었으며, 볼테르는 “나는 죽는다”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그렇다. 이 엉뚱한 수수께끼의 답은 ‘문인들이 죽음 직전에 한 말들’이다. 프랑스의 작가 겸 문학평론가 미셸 슈나이더가 자신의 2003년 저작 <죽음을 그리다>(이주영 옮김, 아고라 펴냄)에 모아 놓은 수집품의 일부.
<죽음을 그리다>는 미셸 드 몽테뉴에서부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까지 서구의 문인과 지식인들이 죽음에 임박해서 내놓은 말과 글을 통해 죽음과 문학의 관계를 천착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언어가 죽음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일이다.” 그럴듯하다. 내친 김에 프란츠 카프카가 죽기 10년 전에 쓴 일기의 한 대목을 들여다보자.
“성공적이고 아주 설득력이 있는 모든 글에서 다루어지는 소재는 죽음을 맞는 사람, 아주 힘들게 죽는 사람, 죽는 것이 억울하거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좋은 글이란 어떤 식으로든 죽음과 죽는 이를 다룬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문인들이란 평생을 죽음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을 하는 ‘죽음 전문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들이 죽음의 순간에,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하게 되는 죽음에 관해 내뱉는 한마디를 어찌 소홀히 흘려들을까 보냐.
그렇지만 파스칼의 말마따나 인간은 혼자이며 따라서 홀로 죽는 존재다. 죽음이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고독하고 일회적이며 불가역적인 경험이다. 죽음을 맞는 순간 당사자의 머릿속에 어떤 천사 또는 괴물이 들어오는지 남들은 알 수가 없다. 죽은 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라는 것도 반드시 정확하게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 가령 칸트가 임종시에 한 말은 “그만”이었다지만, 그것은 철학자다운 의연함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은 설탕물에 포도주 탄 것을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먹여주던 하인에게 한 말이었다. ‘그만 달라’는 뜻.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유명한 ‘신화’도 오해의 소산이다.
요컨대 누구도 타인의 죽음의 진실을 완벽하게 포착하기는 어렵다. <죽음을 그리다>의 지은이가 “작가들의 죽음과 그들이 남긴 글을 소설적으로 엮은 책”을 표방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유대인 문학비평가 발터 베냐민이 치사량의 모르핀을 삼키고 죽기 직전 했을 법한 말로 지은이는 ‘원고’ ‘편지들’ ‘어느 곳에도 없는’과 같은 것들을 상상한다. 나비 사냥을 나갔다가 실족해 죽은 나보코프의 임종사로 “내 인생이야말로 초벌 원고다”를 택한 것도 순전한 소설적 설정이다.
독일 출신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나치의 추적을 피해 머나먼 땅 브라질에서 부인과 함께 자살을 택한 것을 일러 ‘표절된 죽음’이라 규정할 때 지은이의 소설적 자유는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츠바이크가 일찍이 독일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동반 자살을 두고 “그 어떤 시인도 클라이스트만큼 숭고한 최후를 맞지 못했다”며 선망하듯 쓰지 않았겠는가.
문인과 죽음, 현실과 소설이 서로 넘나들며 얽히는 양상을 책에서 확인한 뒤라면 지은이의 다음과 같은 결론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인생은 다른 인생을 모방하고, 소설은 전기를 모방하고, 죽음은 소설을 모방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