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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문학 물고 늘어진 ‘메타 소설’

등록 2006-07-06 20:31수정 2006-07-07 14:50

비늘 천장<br>
엄창석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9800원
비늘 천장
엄창석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9800원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담아내는 입”
현실과 문학의 일치 넘어, 작가도 ‘한 몸’ 되고자하는 욕망
끈기있게 ‘문학의 본질’에 접근한 소설 7편 묶어내
엄창석(45)씨의 <비늘 천장>(실천문학사)은 문학의 본질과 기능, 정체성의 위기와 관계의 존재학 같은 묵직한 주제에 다각도로 접근한 소설집이다. 책에는 중편 하나와 단편 여섯이 묶였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활자를 새기는 각자공(刻字工) ‘복인춘’이라는 인물이다. 때는 조선 땅에 천주교가 유입되던 19세기 말. 중국에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조선말로 옮긴 원고를 들고 화자가 평양으로 복인춘을 찾아온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흡사 혼을 심어놓는 듯”한 솜씨를 지닌 인춘으로 하여금 최초의 조선어 성서를 새기도록 하려는 것이다. 화자의 아버지에 따르면 “인춘은 비록 장출(匠出)에 불과하나 자신의 활자가 새로운 문물을 담아 나르는 그릇이 돼야 한다는 기개를 품고 있었”다.

인춘에게는 활자에 관한 나름의 철학이 있다. “하나의 활자에는 과거와 미래가 겹쳐져 있”으며 “활자는 책의 안만 아니라 책의 밖으로도 끝없이 유랑을 한”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활자’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작품의 화자 또는 작가는 인춘의 이 말을 더 큰 맥락으로 확장해서 받아들인다: “어디 활자뿐이랴. 한 상황에는 언제나 다른 상황의 기미들이 숨어 있으며 그것은 어떤 세밀한 흐름을 좇아 새로운 상황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다시 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춘은 조선어 성서의 활자를 새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어떤 계기에 의해 “활자가 무한으로 조합되었던 게 아니라, 허용된 안쪽으로만 조립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품게 된 그가 고의로 자신의 오른손 검지를 잘랐던 것. 이 대목에서부터 ‘움직이는 활자’에 대한 순진한 낙관은 그 이면을 보려는 노력 쪽으로 방향을 튼다. ‘허용된 안쪽’에만 머물러 있던 활자는 움직임을 멈추었고, 오히려 “활자의 부스러기에서 자란 구더기들이 움직이고 있더란 것”이다. “역병이 든 양민들의 등창에서, 난리 중에 쓰러진 이들의 갈비뼈 사이에서, 옛날 장강의 운하를 파던 그곳 사람들의 짓물러가는 대퇴부에까지….” 인춘의 이런 고백은 억눌리고 감추어진 진실의 복원이라는 문학의 기능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다.

“활자는 책 밖으로 끝없이 유랑”

‘설낭(說囊)’이라 불린 이야기꾼을 주인공 삼은 <해시계> 역시 문학에 관한 통찰을 담은 ‘메타소설’이라 이를 법하다. 이야기꾼 ‘채물음’은 장터의 감나무 아래 모여든 사람들에게 홍경래난 당시 정주성 싸움 장면을 들려준다. 기묘한 것은 채물음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이야기와 현실이 하나로 몸을 섞는 듯한 착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채물음이 백성들을 선동한다는 의심을 품는 한 인물은 “너는 천 가지 이야기를 한 가지로만 꾸미고 있다. 그것은 한 가지가 사람들에게 들어가 천 가지 이야기로 풀리기를 바라고서 하는 것이 아닌가” 추궁하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지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이야기지요. 사람들이 곧 이야기고, 이야기가 곧 사람들이오”라는 채물음의 말은 그에 대한 일종의 시인이겠는데, 문학과 현실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고양이가 들어 있는 거울>과 <쉰네 가지의 얼굴>은 각각 수사관과 탈옥수의 이야기이거니와, 문학에 관한 작가의 고민은 여기서도 이어진다. <고양이가 들어 있는 거울>의 주인공인 수사관은 그 자신이 범인이며, 완전범죄로 끝난 사건들에 관한 책을 쓰는 인물이다. “완전범죄는 범인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범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한 작중 인물의 말, 그리고 수사관이자 범인이라는 주인공의 모순적 정체성은 진실의 가능성과 성격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쉰네 가지의 얼굴>의 탈옥수는 “변장할 때마다(…) 또 한 사람의 인격으로 나뉘는” 체험을 한다. 게다가 경찰은 그의 노트를 훔쳐 가서는 그의 행세를 하는 ‘박’이라는 인물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문학과 별 관련 없을 듯한 수사관과 탈옥수의 세계를 통해 글쓰기와 정체성, 의식과 무의식, 진실과 허구의 관계 등을 파고드는 작가의 끈기가 놀랍다.

수사관·탈옥수 세계의 고민도 ‘문학’

이상에서 소개한 두 편의 역사물과 두 편의 수사물이 소설집 <비늘 천장>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 네 작품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관계에의 성찰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모든 사물은 따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움직이는 활자가 증명하고 있다”는 복인춘의 믿음,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로써 수 천 수 만의 이야기를 수렴하고 다시 확산시키고자 하는 채물음의 은밀한 욕망에서 그 점은 뚜렷하다.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쉰네 가지의 얼굴>의 한 대목 역시 같은 맥락에 놓인다. 반대로 <고양이가 들어 있는 거울>에서는 하나의 인격이 수사관과 범인이라는 상반된 역할로 분열되는 양상이 나타나지만, 그 역시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의 부인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작품들과 맥이 통한다 하겠다.

<비늘 천장>과 <해시계>의 결말이 문학과 현실의 일치를 넘어서, 그렇게 하나 된 문학·현실과 작가 자신의 일치까지를 꿈꾸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복인춘의 모습이, 흡사 커다란 구더기가 어디론가 가려고 꿈틀대는 형용처럼 보였다”(<비늘 천장>)거나 “채물음이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갔을 것만 같았다”(<해시계>)와 같은 문장들에는 현실과 하나 된 문학, 다시 그 문학·현실과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이 환영의 장치를 빌려 강렬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해시계>의 화자는 하늘로 열린 반구형 해시계를 보면서 “세상에 편만한 온갖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로 담아내는 채물음의 입”을 떠올리는데, 그 입이야말로 작가 자신의 지향에 대한 함축적인 상징이라 하겠다.

상술하지는 못하지만, 소설집 <비늘 천장>의 나머지 세 작품 역시 나름대로 재미와 의미를 고루 갖춘 수작들이다. 카프카 소설 주인공 같은 단식 광대를 기대했다가 거꾸로 ‘비만 광대’를 만나는 이야기를 담은 <몸의 예술가>, 아파트 안에 들어온 뱀 때문에 펼쳐지는 공포의 신경전을 그린 <호랑이 무늬>, 그리고 유일한 중편소설로서 성격이 다른 두 친구의 평생에 걸친 경쟁을 추적한 <오래된 전쟁>까지 두루 흥미롭게 읽힌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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