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꼽히는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는 영구불변의 도덕률은 없다는 진리를 구체적인 성풍습을 통해 보여준다. 사진은 채색 동판화 <영국의 창녀>. 까치 제공
제도·법률·사상의 근본요소를 ‘성행동’으로 본 푹스
중세 이후 서양의 성풍속 집대성하며
시대따라 계급따라 변화하는 도덕률 간파
사물의 핵심은 ‘과장’됨으로써 드러난다고 봐
중세 이후 서양의 성풍속 집대성하며
시대따라 계급따라 변화하는 도덕률 간파
사물의 핵심은 ‘과장’됨으로써 드러난다고 봐
고전 다시읽기/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는 ‘인류의 기념비적 저작’이다. 나는 이 책을 내가 읽은 번역서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물론 번역도 무난하다.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이지만 독일어판을 직역한 것이 그만한 감동을 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여기에는 이 책을 일본어로 옮긴 야스다 도쿠타로의 공이 적잖다. 야스다는 푹스가 전문가용으로 엮은 <풍속의 역사> 보유(Beilage)편을 일흔의 나이에 번역하기도 했다.
<풍속의 역사>의 번역 출간은 우리 출판 역사적인 의미도 있다. 이 책이 우리말로 옮겨지면서, 레이 탄나힐의 <성의 역사>(김광만 옮김, 김영사, 1982)로 시작된 ‘성풍속서’의 장르적 기반이 다져졌다. 한국어판 <풍속의 역사> 초판은 1986년 1월부터 1988년 5월까지 2년 반에 걸쳐 나왔다. 한국어판은 독일어판 원서와 편제가 약간 다르다. 독일어판 원서가 르네상스, 절대주의, 부르주아 시대의 성풍속을 3권에 담았다면, 한국어판은 이를 4권으로 재구성했다. <풍속의 역사Ⅰ―풍속과 사회>는 푹스의 이론적 논의와, 각 시대의 배경과 내용을 간추린 각권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모았다. 2001년 봄, 선을 보인 개역판은 새로운 도판을 쓰고 초판의 오탈자를 바로잡았다.
중세 이후 서양의 성풍속을 집대성한 <풍속의 역사>는 선정적이기는커녕 하나도 야하지 않다. 적어도 책에 실린 그림이 몇 안 되는 첫째 권 <풍속과 사회>의 초판은 그랬다. 푹스는 “각각의 특수한 계급이익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모든 삶의 이해관계에 기초를 둔 사고방식”으로 도덕을 정의한다. 말하자면, “어느 때는 도덕적인 것이 또다른 때는 부도덕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아울러 “도덕은 각 계급에 따라서 때로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각 계급끼리 정면으로 대립할 수도 있다.” 푹스가 도덕이 영구불변하다는 사고방식과 일반적 도덕기준을 부정한다고 해서 역사에서의 도덕적 원동력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원동력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이것을 강조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구불변인 도덕률이 항상 역사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논리학보다도 뛰어난 손놀림으로 이 영구불변의 도덕률을 여기저기 끼워맞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러한 태도로는 과거의 어떠한 현상도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인식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쏟아지는 과거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해명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과거를 비난하려고 하는 것은 실로 유치하고 어리석은 행위이다.”
과장의 진수 캐리커처 연구
일본어판에서 전재한 출처와 작자 미상의 ‘푹스론’은 그를 학문적 연구가, 미술사 연구가, 저술가, 수집가, 제본가 등으로 나눠 살핀다. 푹스는 널리 보급되면 곤란한 자료를 따로 묶어서 펴낼 만큼 사려 깊은 모럴리스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책의 ‘서문’에서 푹스는 자신이 캐리커처 연구가로 알려진 것에 대해 자신은 문명사가로서 캐리커처를 연구한 거라고 해명한다. ‘서론’에서 푹스는 캐리커처를 다시 언급하는데 이러한 재언급은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다는 푹스의 명제와 관련이 있다. 사물이나 인간은 극단으로까지 과장됨으로써 본질이 도드라지는데 캐리커처는 과장이라는 경향의 진수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기록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캐리커처의 본질은 과장이다.
“고전의 실례를 들면, 가장 대담한 역사적 캐리커처인 루브르 박물관의 루벤스의 명화 ‘플랑드르의 축제’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농민의 교회 헌당 축제가 그렇게 고주망태가 되어 무서울 정도로 애욕적 광란에 빠져서 행해진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는 실로 훌륭한 진실이 담겨 있다. 과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장 때문에 훌륭하다. 과장됨으로써 사물의 핵심이 드러나고, 그것을 은폐시키려는 가식은 제거된다.”
푹스는 의복과 연애와 결혼의 본질을 간파한다. “복장의 모양을 결정하는 요인은 기후가 아니라 인류의 일반 사회생활이다.” 유행하는 옷은 늘 계급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복잡한 복장은, 이를테면 자동차나 기차와 마찬가지로, 이제 와서는 폐기할 수 없는 문명의 산물이다.” 어느 시대나 명성, 총애, 권력 따위를 사들이는 화폐 구실을 하는 것이 연애의 본질이다. 연애의 상품성은 그 시대 문명의 발전정도를 재는 유일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금전결혼과 인습결혼은 내부적인 필연성을 가지며 조만간에 상호 부정(不貞)으로 귀결”된다. “인류의 영원한 권리를 인위적인 법률보다 위에 두는 모럴이라는 입장에 설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때문에 인습결혼이 성행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간통이 도처에 영구히 뿌리를 뻗치고 있다.”
내가 <풍속의 역사>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옷과 사랑과 결혼의 본성을 꿰뚫어본 때문만은 아니다. 이 땅의 32년간의 군사통치 주역과 그 협조자를 비판하는 대목이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군부 지배가 저물 무렵 이 책 초판을 읽었다. 도덕률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같은 책도 읽을 때마다 독후감은 매번 다르다. 그런데 웬걸, 내가 대리만족을 느낀 구절들이 주는 느낌은 예전과 별반 다를 게 없잖은가. “장교란 언제나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존경을 특히 과대하게 요구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서 자신들의 특권을 쌓으려고 하는 계급을 대표”한다. “경찰은 부자나 유력자를 공공연하게 사건에 연루시키는 일에 결코 열의를 나타내지 않는다.” 현대사회에 대한 통찰 역시 그렇다. “현대는 매우 점잖은 것 같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이전에는 최대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도 오늘날에는 시시하다고 웃고 넘기며, 며칠 내에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놀랄 만한 것이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것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신문·엽서 등 성도덕 선전가 구실
푹스는 부르주아 시대의 신문, 그림, 입간판, 그림엽서, 사진 들과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이 일정하게 성도덕을 계몽하거나 직접적인 선전가 구실을 한다고 본다. 또한 이것들은 현대의 풍속을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처럼 풍부한 자료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를 내리는 것”을 넷째 권 <부르주아의 시대>의 주요 목적으로 삼지만, 푹스는 “때때로 개괄적 입장만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며 한 발 물러선다. 자본주의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 시대가 사회를 총체적으로 지배하게 됨으로써 그것을 한정된 범위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마치 인생이나 개인 문제의 복잡한 형태를 단편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아서다. 하여 푹스는 “골라낸 단편적인 것을 자본주의의 특징이라는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거기에서 사유재산제를 토대로 한 자본주의 문화라는 거대한 실체를 그리는 일은 미래의 저술가”의 몫으로 남긴다.
최성일/출판 칼럼니스트
서평자 추천 도서
풍속의 역사Ⅰ~Ⅳ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이기웅·박종만 옮김
까치 펴냄(2001, 개역판)
(저자의 관점과 풍부한 예증이 돋보이는 노작)
세계풍속사 1-3
까치 펴냄(2000)
(1권과 2권은 <세계풍속사>(이윤기 옮김, 1991~1992) 상·하권으로 나왔던 파울 프리샤우어의 책으로 원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성풍속을 다룸. 고트프리트 리슈케와 앙겔리카 트라미츠가 공저한 3권(김이섭 옮김)은 현대의 성혁명을 문화적 현상으로 분석)
중국 성풍속사
R.H. 반 훌릭 지음. 장원철 옮김
까치 펴냄(1993)
(고대 중국인의 성의식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연구)
침실의 문화사
파스칼 디비 지음. 편집부 옮김
동문선 펴냄(1994)
(성풍속의 사회상을 침실을 통해 드러냄)
이야기 성풍속사
브랑톰 지음. 임승신 옮김
산수야 펴냄(1995)
(푹스, 프리샤우어, 디비의 책에 인용되는 성풍속 문학서의 고전)
근대 유럽의 삽화 ‘데콜테에 관한 연구’. 데 콜테는 유방의 형태나 체형, 연령에 따라 착용하는 보형물의 일종으로, <풍속의 역사>에 따르면 유방이 훌륭한 여성은 하트 형의 데콜테를 선택했으며 평평하게 내려온 어깨나 납작한 유방을 가진 여자들은 둥근 데콜테를 선택했다고 한다. 데콜테는 여성의 성적 매력을 강조하기 위해 가슴둘레나 목둘레의 형태를 될 수 있는 한 이용해 아름답게 보이려는 기술이 발달한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최성일/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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