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 첫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젊은 작가 손홍규(31)씨의 첫 장편 <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중앙)는 노령산맥의 그늘과 울음에 관한 소설이다. 전북 정읍 출신인 이 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고향 어름으로 짐작되는 “노령산맥 그늘 아래 대대로 머슴들만 모여 사는” 마을을 배경으로 그곳 사람들의 희노애락애오욕을 기록한다. 소설은 낚시터에서 마주친 “수다스러운 소년”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태로 되어 있다. 그것은 가히 이야기의 폭죽과도 같아서, 400쪽 가까이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의 소설에는 숱한 사람들이 태어나는가 하면 늙어 죽고, 사랑하는가 하면 미워하고 싸우며, 돕고 속이고 질투하고 때리고 쫓고 욕하고 동정하고 충고하고 울고 웃고 헐뜯는다. 요컨대 거기에는 삶의 온갖 꼴이 다 들어 있다.
수다쟁이 소년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로 주인공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소설의 앞부분은 역시 소년과 그의 수호신 격인 ‘따식이’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끌어 간다. 따식이는 누구인가. “따식이는 자기 존재의 비루함으로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역설하였고 곧 종말을 맞을 듯한 위태로운 삶으로 사람 한 명 한 명을 이 순간에 존재케 한 그 놀랍도록 끈질긴 생명의 연속성을 증명했다.”(13쪽) 어릴적 앓은 열병의 흔적으로 수족이 자유롭지 못한데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글도 깨우치지 못한 천덕꾸러기 신세이지만 남들이 지니지 못한 예지력을 지닌 듯한 ‘따식이’는 마을의 대소사를 관찰하고 참예하면서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구실을 맡는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가 고문을 받고 낙향한 종구 형,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되살아난 넛할아버지, “고샅길에 떨어진 소똥을 땔감으로 썼고 닭똥을 퇴비로 썼으며 개똥을 약으로 썼”던 작은할머니, 그 자신 죽은 귀신이 되어 ‘나’에게 귀신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딸만 내리 아홉을 낳은 댓골댁네 식구들, 삼청교육대를 다녀와서 제복 입은 이들만 보면 폭력을 휘두르곤 하는 행기 아저씨 등이 그렇게 소개된다.
전반부에서 장삼이사들의 작은 이야기를 흥겹게 들려주던 소설은 뒷부분으로 가면서 노령산맥으로 상징되는 집단 주인공의 커다란 이야기로 중심을 옮긴다. 어조는 비장해진다. “노령산맥이 굽어보는 대지의 사람들은 풍요로운 농토와는 반대로 허기진 삶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었다. 노령산맥은 해마다 조금씩 낮아졌고 또한 고통에 조금씩 몸을 비틀었다.”(99쪽) 동학농민전쟁에서 빨치산 투쟁을 거쳐 80년대의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의 커다란 흐름이 마을 사람들의 삶에 섞여 든다. 가령 수세 폐지 투쟁에 나선 농민들의 선두에 선 삼촌은 이렇게 묘사된다. “삼촌은 과거를 거슬러 가고 있었다. 갑오년 삼촌의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뎅겅 목을 잘랐던 관군이 되어보기도 했으며, 낫에 목이 잘린 삼촌의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되어보기도 했다.”(332쪽)
소설의 앞부분에서 화자는 “이야기가 진전되어갈수록, 나의 상상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에 끌려다니기 시작했다”(46쪽)고 쓰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설에서 이야기는 무언가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못했다. 나는 귀신이 되어서도 산 사람처럼 살았다”(360쪽)는 토로는 삶과 죽음을 한통속으로 파악하는 우리네의 전통적 사생관에 충실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미학. “결국 내가 보려 했던 건(…)아름다움이었다”(361쪽)고 화자가 쓸 때, 이 말은 손홍규 미학의 탄생 선언이라 보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대화의 반을 ‘거시기’ 한 단어로 처리하는”(한창훈) 이 ‘촌놈’의 뜻밖의 다변과 달변이 놀랍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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