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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모국의 호수 밤마다 가득 채우는 ‘악어의 눈물’

등록 2006-08-31 19:18수정 2006-09-01 14:39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br>
마종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6000원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마종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6000원
40년 미국생활 접고 아예 돌아온지 4년
고향에 그 고향 없어 떠난자는 오히려 남은자들
악어의 후회와 도마뱀의 그리움으로 서로를 부르다
우리는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40년 남짓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시를 써온 마종기(68)씨가 4년 만에 새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를 펴냈다. 그의 소년기부터 친구인 황동규씨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출판사는 문학과지성사다.

“오래 전 내가 남기고 떠난 숲과 길과 냇물이여,/꽃 한번 피워보기도 전에 가을이 무르익었으니/탕진한 내 씨앗은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닳아지고 구겨진 내 어깨를 내릴 곳은 어디인가.”(<가을, 상림(上林)에서> 부분)

마종기씨의 시가 떠나 온 자의 회한과 그리움을 노래한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그가 “고국에서 밀려나던 60년대 초”(<압구정동>) 이후 그는 모국과 그곳 친지들을 향한 그리움을 토로하기 위해 자신의 모국어를 벼려 왔다.

밀려났든 자의로 떠나왔든, 고국을 떠난 자로서의 안타까운 후회와 반성은 그의 시에서 단골로 노래되는 감정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에서도 후회와 반성은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데, 특히 자신을 도마뱀과 악어 같은 파충류에 비유한 시들이 흥미롭다.

“내가 도마뱀의 끊어진 꼬리를 두 개나 가지게 된 날 밤, 나는 내 머리가 없는 것을 알았다. 처음 가졌던, 내 아버지가 주신 머리가 없는 것을 알았다.(…)머리 없는 몸뚱이와 사지만으로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숨어 사는 도마뱀. 가끔은 내 머리가 그리워진다. 잘려나간 내 머리는 지금쯤,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도마뱀> 부분)

“고국과 외국에서 오락가락 살고 있는 나도 눈 감고 사는 파충류, 또는 양서류인가.//(…)/악어는 왜 아직도 말없이 뻘밭을 기며 외국에서 혼자 사는가.//(…)/흰 낮달을 올려다보며 살아낸 60 몇 년의 악어의 유랑,(…)한밤의 악어의 눈물, 그 두 뺨 뜨거운 후회 밤마다 내 호수를 채운다.”(<악어> 부분)

앞서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고자 모국어를 벼렸다고 썼지만, 시인에게 그리움과 모국어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목적이고 다른 것이 수단이 되는 관계는 아니다. 모국어가 있어 그리움을 표현하지만, 표현할 그리움이 있을 때에야 모국어 역시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잡담 길들이기 7>이라는 시를 보자.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국 오대호 근처 도시에 살던 시인은 월드컵이 다 끝난 날 동네의 한인 친구들과 함께 조국의 월드컵 4강을 축하하는 술을 나눈다. 일행들과 잔을 부딪치던 시인은 “자동차 공장 노동자로 30년째 일하는 대졸 미스터 김”의 붉은 눈시울을 목격한다. 이 때의 붉어진 눈시울이란 무슨 뜻이었을까. “기쁨이었겠지. 슬픔이었을까, 충만감이었을까 아니면 외로움의 한이었을까.”

정답은 아마도 ‘그 모든 감정의 총합’일 것이다. 오묘하고 착잡하기 짝이 없어서 무엇이라 한 마디 말로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힘든 어떤 경지. 그것이야말로 바로 ‘시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게 시인의 생각이다. ‘시’를 굳이 한자 ‘詩’로 표기하면서까지 강조하고자 한 것이 바로 시적인 것의 그런 미묘한 경지가 아니겠는가.


“너무 아름답고 빛나서/보이지 않는 詩,/의미가 없어진 詩,/너무 순하고 깨끗해서/이해할 수 없는 詩,/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詩,/혈혈단신의 몸이 다시 되어/그 詩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잡담 길들이기 7> 부분)

그 시(적인 것)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바람은 <시쓰기>라는 시에서 “높고 먼 산을 향해/힘껏 돌 하나 던지기./(…)//내 몸 하나 던지기.”라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시 쓰기란 모국을 향한 그리움을 견디는 방법이요 혼신의 힘을 다해 그 그리움을 사는 방식이기도 한 것.

“모두 함께 모였던 한낮의 춤은/언제 어느 세월로 돌아갔을까./(…)/젊었던 내가 흘려보낸 바람들/아직 바다에 떠서 몸 뒤척이고//그 시절의 부드러운 젖가슴 닫은 채/떨리는 무늬 고운 한숨만으로/한 줄씩 긴 수평선 되어/말없이 나를 꾸짖데.”(<파도의 말 1> 부분)

인용한 시에서 그리움의 대상은 공간에서 시간으로 슬며시 몸을 바꾼다. 시인은 어지러운 낮꿈에서 깨어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낯선 주위를 둘러본다. 반갑다며 몰려와 인사를 하던 파도가 어느 순간 잘 가라 중얼거리며 멀어지듯, 지난 시절의 추억들은 친근하게 다가와 그를 다독이더니 문득 낯을 바꾸어 꾸중을 내린다. 이 때의 꾸중이란 물론 <도마뱀>의 그리움과 <악어>의 후회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돌아왔구나, 하고 친구가 말했다./오래도록 나가서 떠돌며 살더니/이 일 저 일 털어내고 맨손으로/돌아왔구나, 하고 나를 잡아준다./그런데 나는 정말 돌아온 것일까./나 살던 동네도 모습 찾기 힘들고/알던 사람들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귀향> 부분)

몇 해 전 시인은 미국의 업무를 정리하고 귀국을 단행했다. 물경 40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 보니 고향은 그 고향이 아니더라는 말씀. 고향이란 단지 공간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 시간 축 위의 좌표점과도 관련되는, 삼차원적 실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알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떠나지 않았다”(<귀향>)는 억설(臆說)이 역설적 진실로 성립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떠난 자란 시간의 진행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진실로 ‘남은 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떠난 것은 오히려 남은 자들. “모든 게 조금 늦었을 뿐인데 동행들은 제 갈 길로 떠나고 말았다.”(<화장실의 피카소>)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물리적 주소지는 아니지 않을까. 왜냐하면 “처음에는 너도 나도 섬이었”(<다도해를 보며>)으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고 경계를 허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이름 부르기>) 불행히도 그 답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새가 부르는 제 이름은 “비슷한 새”이자 “자기 새”(이상 <이름 부르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와 ‘너’가 하나 되어 ‘우리’가 되는 것이 바로 새의 울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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