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역사비평’ 동아시아에 대한 역대 지식인 관점 정리
계간 〈역사비평〉이 동아시아에 대한 역대 한국 지식인 및 정치가들의 관점을 정리했다. 가을호 특집에서 유길준·안중근·최남선·이승만·박정희·노무현의 동아시아 구상을 비교·분석했다. 앞으로 신채호·김구·김일성·노태우·김대중·리영희 등의 동아시아 인식과 구상을 더 정리할 계획이라고 편집진이 밝혔다. 평화지향 담론으로서의 ‘동아시아론’이 유난히 발달한 한국 지성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기획으로 평가된다. 지식인 중심이 아닌 정치가 중심의 접근이라는 관점이 새롭다.
여러 학자들이 글을 실었는데, 유길준과 안중근의 동아시아 인식을 비교한 현광호 고려대 강사의 글이 흥미롭다. 개화기부터 한일병합에 이르는 시기를 대표하는 두 인물은 일본을 개혁의 수단으로 삼아 한국(조선)의 부강과 독립을 이뤄 당대의 동아시아 정세를 돌파하려 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단순히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중층적인 국제정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안중근의 길
한국의 독자적 발전 전제한 한·중·일 평화공존 추구 그러나 닮은 점만큼 다른 점도 많다. 현광호는 이 글에서 “안중근은 한국을 동아시아 구상의 주체로 설정한 반면, 유길준은 일본을 동아시아 구상의 주체로 설정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의 동아시아론과 유길준의 동아시아론은 21세기 국제정세에 대한 국내 논자들의 최근 논쟁에까지 뻗어 있다. 유길준은 “일본을 통해서라도 근대화를 이뤄보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한국을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제안까지 했던 그는 ‘탈중’을 최대의 과제로 인식했다. 강대국 일본의 존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일본의 보호정치까지 긍정했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독립시키려는 일본의 뜻이 담긴 것으로 이해했다. 유길준은 약소국이 생존하려면 반드시 강대국에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인식했다. 헤이그 특사의 활동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유길준의 길
일본을 중심에 둔 발전 구상 대외의존 전략 이승만·박정희로 반면 안중근은 “동아시아 세 나라 가운데 한 국가라도 독립이 훼손된다면 동아시아의 평화는 깨질 것”이라고 봤다. 러-일 전쟁 때까지만 해도 안중근 역시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 구실을 해야 한다는 ‘일본맹주론’을 긍정했다. 그러나 한국의 주권 유지가 한-중-일 제휴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때문에 점차 일본식 동양평화론의 허구성을 강력히 비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독자적 진보능력이 있는 한국을 일본이 오히려 퇴보시켜 식민화하고 있다는 게 안중근의 판단이었다. 현광호 강사는 “한국의 독자적 발전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본 유길준에게 일본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던 반면, 안중근은 한국의 자주적 개혁능력을 신속히 하기 위해 잠시 일본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고 평가했다. 유길준의 구상에서는 중국이 철저히 배제됐던 데 비해 안중근의 이념에는 항상 한-중-일이 공존했다는 점도 중요한 차이다. 〈역사비평〉에 실린 다른 글들은 이후 이승만·박정희가 ‘유길준의 길’을 걸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의 동아시아는 미국 중심의 질서였다.(박진희 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 박정희에게는 미국만큼이나 일본이 중요했다.(박태균 서울대 교수) 두 정치인 모두 중국을 배제한 채, 강대국의 질서에 편입하려는 전략을 펼친 셈이다. 노태우에 이르러서야 중국이 등장했고, 김대중은 마지막 ‘고립지역’이었던 북한을 시야에 올려놓았다.(박명림 연세대 교수) 박명림 교수는 “안중근 이래 한국민이 실현하려 했던 거시적 동아시아 인식에 비춰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구상’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주변 4강과 북한을 포함하는 부챗살 확장 외교의 완성”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방략과 수단이 아직 부족하고 선명한 언명이 현실을 자주 앞서가는 점이 아쉽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의 길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셈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한국의 독자적 발전 전제한 한·중·일 평화공존 추구 그러나 닮은 점만큼 다른 점도 많다. 현광호는 이 글에서 “안중근은 한국을 동아시아 구상의 주체로 설정한 반면, 유길준은 일본을 동아시아 구상의 주체로 설정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의 동아시아론과 유길준의 동아시아론은 21세기 국제정세에 대한 국내 논자들의 최근 논쟁에까지 뻗어 있다. 유길준은 “일본을 통해서라도 근대화를 이뤄보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한국을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제안까지 했던 그는 ‘탈중’을 최대의 과제로 인식했다. 강대국 일본의 존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일본의 보호정치까지 긍정했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독립시키려는 일본의 뜻이 담긴 것으로 이해했다. 유길준은 약소국이 생존하려면 반드시 강대국에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인식했다. 헤이그 특사의 활동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유길준의 길
일본을 중심에 둔 발전 구상 대외의존 전략 이승만·박정희로 반면 안중근은 “동아시아 세 나라 가운데 한 국가라도 독립이 훼손된다면 동아시아의 평화는 깨질 것”이라고 봤다. 러-일 전쟁 때까지만 해도 안중근 역시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 구실을 해야 한다는 ‘일본맹주론’을 긍정했다. 그러나 한국의 주권 유지가 한-중-일 제휴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때문에 점차 일본식 동양평화론의 허구성을 강력히 비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독자적 진보능력이 있는 한국을 일본이 오히려 퇴보시켜 식민화하고 있다는 게 안중근의 판단이었다. 현광호 강사는 “한국의 독자적 발전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본 유길준에게 일본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던 반면, 안중근은 한국의 자주적 개혁능력을 신속히 하기 위해 잠시 일본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고 평가했다. 유길준의 구상에서는 중국이 철저히 배제됐던 데 비해 안중근의 이념에는 항상 한-중-일이 공존했다는 점도 중요한 차이다. 〈역사비평〉에 실린 다른 글들은 이후 이승만·박정희가 ‘유길준의 길’을 걸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의 동아시아는 미국 중심의 질서였다.(박진희 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 박정희에게는 미국만큼이나 일본이 중요했다.(박태균 서울대 교수) 두 정치인 모두 중국을 배제한 채, 강대국의 질서에 편입하려는 전략을 펼친 셈이다. 노태우에 이르러서야 중국이 등장했고, 김대중은 마지막 ‘고립지역’이었던 북한을 시야에 올려놓았다.(박명림 연세대 교수) 박명림 교수는 “안중근 이래 한국민이 실현하려 했던 거시적 동아시아 인식에 비춰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구상’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주변 4강과 북한을 포함하는 부챗살 확장 외교의 완성”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방략과 수단이 아직 부족하고 선명한 언명이 현실을 자주 앞서가는 점이 아쉽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의 길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셈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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