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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죽음은 우릴 지탱해줄 탄생의 서막

등록 2006-10-19 20:11

체인지링<br>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9800원
체인지링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9800원
“엄마, 나는 죽는 걸까?”/(…)/

“만일 네가 죽어도 내가 다시 한 번 낳아줄 테니 괜찮아.”

“…하지만 그 아이는 지금 죽어가는 나와는 다른 아이잖아?”

“아니요, 똑같아요. 네가 나한테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고 듣고 한 것, 읽은 것, 해온 일, 그것을 모두 다 새로운 네게 이야기해줄게. 그리고 지금 네가 알고 있는 말들을, 새로운 너도 이야기하게 되는 거니까 두 아이는 완전히 똑같아.”(353쪽)

기이한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이 말은 오에 겐자부로(71)의 소설 <체인지링>의 말미께에 나오는 대사다. 작가 자신을 모델로 삼은 작중 인물 ‘고기토’가 쓴 글의 일부인데, 어린 시절 중병에 걸려 죽음의 위협을 느끼던 작가가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로 되어 있다. 지난 2001년 국내에도 번역된 작가의 산문집 <나의 나무 아래서>에도 같은 일화가 나온다.

<체인지링>은 오에의 친구이자 처남인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의 자살(1997년)이 가까운 이들에게 남긴 파장을 소재로 삼는다. 오에 자신이 ‘마지막 장편 삼부작’의 첫 편으로 명명한 작품이다. 나머지 두 작품 <우울한 얼굴의 아이>와 <책이여, 안녕!> 역시 출간을 준비 중이다.

소설 속에서 이타미 주조는 ‘고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사회파 감독으로 흥행과 예술적 평가에서 두루 성공했던 고로의 돌연한 자살 이후 남은 사람들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다. 언론에서는 고로가 불미스러운 스캔들 때문에 죽음을 택했다고 보도하지만, 고기토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가 야쿠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가 칼침을 맞았던 일과 이번 사건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로의 누이동생이자 고기토의 부인인 ‘치카시’는 십대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고기토에게 고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숨김 없이 모두 쓸 것을 요구한다. “마츠야마에서 당신과 둘이서 그야말로 기진맥진하여 돌아왔던 한밤중부터 고로는 변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어떤 일이었나요?(…)저는 물론, 당신도 이미 인생의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니 거짓을 말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고, 그대로 쓰기도 하면서… 끝내주세요.”(138쪽)

<체인지링>에서 고기토는 죽기 직전 고로가 보내 온 녹음 테이프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를 곱씹으며 고로가 자살한 까닭을 더듬어본다. 그 결과 십대 후반의 어느날 미군의 무기를 탐내는 우익들이 고로로 하여금 미군 장교와 하룻밤을 보내도록 꼬였던 일을 떠올린다.


‘체인지링’이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생겼을 때 요정이 보기 흉한 아이와 뒤바꿔놓는다는 유럽의 민담에서 유래한 말로 흉칙하게 뒤바뀐 아이를 가리킨다. 치카시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머리도 뛰어났던 오빠가 그 사건을 겪고 난 뒤 다른 사람으로 바뀌자 고기토와 결혼해서 ‘원래의 고로’를 다시 낳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결과는 오에 부부 자신들의 아들과 같은 중증 장애아 ‘아카리’의 탄생이었다. 고로의 자살은 또 다른 체인지링의 가능성을 불러온다. 그가 죽은 뒤 독일에서 날아 온 묘령의 여인 ‘우라’는 자신이 고로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리며 그 아이를 통해 ‘고로’를 다시 낳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아름답고 재능있는 인물의 죽음이 슬픔과 상실만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에의 신념이다. 소설의 마무리는 동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월 소잉카의 희곡 <죽음과 왕의 마부>의 마지막 대사가 담당한다. 죽음에서 탄생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죽어버린 자들은 그만 잊도록 하자. 살아 있는 자들조차도./그대들의 마음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게로만 향해주기를.”(368쪽)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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