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문학동네 펴냄. 9500원
이기호 지음. 문학동네 펴냄. 9500원
소설을 쓸 때는 ‘우연을 피하라’고?
아니, 에라이, 뿅!의 우연이야말로 리얼리즘 아닐까
어이없이 두들겨맞고 갈팡질팡, 출렁거리는 게 삶인걸
익살스런 젊은 작가 이기호가 펴놓은 소설론
아니, 에라이, 뿅!의 우연이야말로 리얼리즘 아닐까
어이없이 두들겨맞고 갈팡질팡, 출렁거리는 게 삶인걸
익살스런 젊은 작가 이기호가 펴놓은 소설론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것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가 자신의 묘비에 새기고자 작성한 문구다. 생의 희극적 허무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작가 이기호(34)씨는 자신을 특집으로 다룬 잡지 <문학동네> 올 여름호에 이 제목의 소설을 ‘자전소설’로서 발표했으며, 내처 새로 내놓은 두 번째 작품집의 제목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자전소설’이라고는 해도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인 만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온전히 작가의 체험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이 작품에 담긴 작가로서의 각오와 문학적 포부만큼은 작가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에라이, 뿅! 만큼 살았으니, 에라이, 뿅! 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겐 리얼리즘이었으니까. 그것이 내 태생이었으니까.”
소설가의 자기증명은 육체노동뿐?
표제작에서 주인공은 유난히도 집단 린치를 많이 당했던 십대 시절을 회고한다. 천원짜리 한 장 지니고 목욕하러 가던 길에 동네 불량배들에게 잘못 걸려 된통 얻어맞은 것을 필두로 거의 넉 달에 한 번 꼴로 두들겨맞았던 날들. 문제는 거기에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원인이 없으니 대책 마련이나 해결책 수립도 쉽지 않다는 데에 난점이 있다. 집단 린치 시리즈의 마무리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 주인공이 당구장에 있는데 그를 벼르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깡패 우두머리가 당구장 건물 계단을 올라온다. 겁에 질려 갈팡질팡하던 주인공은 결국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발목이 삔 줄도 모르고 줄행랑을 치지만, 알고 보니 깡패 우두머리는 그저 볼일을 보고자 당구장 건물 화장실을 찾았던 것. 친구들에 따르자면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덕만인 똥만 쌌을 뿐인데, 쟨 다리가 부러진” 셈이 됐다.
이처럼 허망하게 맞거나 다친 이야기가 소설 쓰기와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학교에서 소설 창작을 배울 때 스승들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우연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이런 요구가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다. 적어도 린치에 시달리던 십대만을 놓고 보자면 그의 삶이란 필연보다는 우연에 더 지배되었던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요, 선생님. 세상 사는 게 언제나 필연적이진 않잖아요?”라는 항변을 비록 입 밖에 내놓은 적은 없지만, 그에게는 ‘에라이, 뿅!’의 우연이야말로 리얼리즘이었다는 말씀.
표제작에서 갈팡질팡하며 어이없이 두드려맞던 소설가는 다른 단편 <수인(囚人)>에서는 죄수와 다름없는 처지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주인공인 소설가 ‘수영’이 바깥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1년 가까이 소설을 쓰고서 나와 보니 세상은 난리가 나 있다. 남쪽의 원자력발전소 두 곳이 폭발하는 바람에 무수한 인명피해가 난 것은 물론이고 낙진 때문에 나라 전체가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수영은 난민들을 심사하는 심판관들에게 자신이 소설가임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로 몰린다. 다행히도 시내 대형서점 소설 코너 한구석에 자신의 소설책 한 권이 꽂혀 있었던 게 기억난다. 불행한 것은, 그 지하서점이 원폭 사고 이후 출입구를 시멘트로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는 것. 수영은 손수 곡괭이를 들고 서점 출입구의 시멘트 벽을 부수기 시작한다. “노동 없는 곳에선 소설도 아무 의미 없는 게 아닌가요?”라며 그를 떠보았던 심판관은 그의 고역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이렇게 두꺼운 벽을 혼자서 다 깼는데 그 이상 무슨 증명이 더 필요합니까?”라는 말로 그의 작업 또는 직업을 인정한다. 가혹한 육체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소설가의 처지를 상징한달까.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후 2년만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가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두루 받은 뒤 2년 만에 묶어 낸 두 번째 소설집에서 이기호씨는 작가 또는 소설에 관한 고민을 작심한 듯 펼쳐 보인다. <나쁜 소설>이라는 작품은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 주는 이야기’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다. 화자는 소설가 자신이고, 소설의 독자이자 주인공인 ‘당신’은 소설가의 최면에 따라 여관방에서 콜걸에게 소설을 읽어 주다가 변태 취급을 받는다. “이 소설도 읽어주는 사람에 따라, 그의 맘에 따라, 계속 변하고 뒤바뀌고 출렁거려, 누가 진짜 이 소설의 원작자인지 모를 지경까지 흘러가길 원합니다. 나는 그런 것엔 하나도 서운하지 않으니까요.” <원주통신>은 기묘한 방식으로 작가와 소설에 관해 말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작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강원도 원주에서 성장했는데 어느 날 그 동네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이사를 온다. 마침 텔레비전에선 <토지>를 드라마로 방영하고, 작가의 이웃에 살던 주인공 소년은 학교 친구들에게 자신이 작가와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자랑한다. 사실은 얼굴 한번 본 적 없으면서. 세월이 흐르고, 주인공이 하릴없는 청년 백수로 방안에서 묵새기던 어느 날 예전 학교 친구가 그를 자신의 룸살롱에 초대한다. 실컷 대접을 받고 나서 상황을 보니, 친구는 자신의 업소가 ‘토지’라는 옥호를 쓸 수 있도록 작가의 승인서를 받아 오라는 것….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와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은 전쟁의 상흔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독특한 방식으로 다룬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책이 아닌, 할머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가 <할머니…>의 첫 문장이고, “할머니는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아왔다”가 끝 문장이다. 그 할머니는 좌와 우로 갈라져 죽고 죽이던 전쟁통에 제 집으로 피신 온 어린 조카를 모른 척 내치는 바람에 죽게 한 일을 악몽으로 간직하고 있다. 장정일 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떠오르게 하는 제목의 <누구나 손쉽게…>에는 북측 미그기 귀순 때 전쟁이 터진 것으로 알고 집 안의 벙커에 들어갔다가 흙을 먹게 된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당신이 잠든 밤에>와 ‘당신이 잠든 밤에 2’라는 부제를 단 <국기게양대 로망스>는 앞선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에서 선보인 바 있는 비루한 주인공 ‘시봉’을 다시 등장시켜 낙오자들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표제작에서 갈팡질팡하며 어이없이 두드려맞던 소설가는 다른 단편 <수인(囚人)>에서는 죄수와 다름없는 처지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주인공인 소설가 ‘수영’이 바깥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1년 가까이 소설을 쓰고서 나와 보니 세상은 난리가 나 있다. 남쪽의 원자력발전소 두 곳이 폭발하는 바람에 무수한 인명피해가 난 것은 물론이고 낙진 때문에 나라 전체가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수영은 난민들을 심사하는 심판관들에게 자신이 소설가임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로 몰린다. 다행히도 시내 대형서점 소설 코너 한구석에 자신의 소설책 한 권이 꽂혀 있었던 게 기억난다. 불행한 것은, 그 지하서점이 원폭 사고 이후 출입구를 시멘트로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는 것. 수영은 손수 곡괭이를 들고 서점 출입구의 시멘트 벽을 부수기 시작한다. “노동 없는 곳에선 소설도 아무 의미 없는 게 아닌가요?”라며 그를 떠보았던 심판관은 그의 고역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이렇게 두꺼운 벽을 혼자서 다 깼는데 그 이상 무슨 증명이 더 필요합니까?”라는 말로 그의 작업 또는 직업을 인정한다. 가혹한 육체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소설가의 처지를 상징한달까.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후 2년만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가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두루 받은 뒤 2년 만에 묶어 낸 두 번째 소설집에서 이기호씨는 작가 또는 소설에 관한 고민을 작심한 듯 펼쳐 보인다. <나쁜 소설>이라는 작품은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 주는 이야기’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다. 화자는 소설가 자신이고, 소설의 독자이자 주인공인 ‘당신’은 소설가의 최면에 따라 여관방에서 콜걸에게 소설을 읽어 주다가 변태 취급을 받는다. “이 소설도 읽어주는 사람에 따라, 그의 맘에 따라, 계속 변하고 뒤바뀌고 출렁거려, 누가 진짜 이 소설의 원작자인지 모를 지경까지 흘러가길 원합니다. 나는 그런 것엔 하나도 서운하지 않으니까요.” <원주통신>은 기묘한 방식으로 작가와 소설에 관해 말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작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강원도 원주에서 성장했는데 어느 날 그 동네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이사를 온다. 마침 텔레비전에선 <토지>를 드라마로 방영하고, 작가의 이웃에 살던 주인공 소년은 학교 친구들에게 자신이 작가와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자랑한다. 사실은 얼굴 한번 본 적 없으면서. 세월이 흐르고, 주인공이 하릴없는 청년 백수로 방안에서 묵새기던 어느 날 예전 학교 친구가 그를 자신의 룸살롱에 초대한다. 실컷 대접을 받고 나서 상황을 보니, 친구는 자신의 업소가 ‘토지’라는 옥호를 쓸 수 있도록 작가의 승인서를 받아 오라는 것….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와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은 전쟁의 상흔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독특한 방식으로 다룬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책이 아닌, 할머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가 <할머니…>의 첫 문장이고, “할머니는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아왔다”가 끝 문장이다. 그 할머니는 좌와 우로 갈라져 죽고 죽이던 전쟁통에 제 집으로 피신 온 어린 조카를 모른 척 내치는 바람에 죽게 한 일을 악몽으로 간직하고 있다. 장정일 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떠오르게 하는 제목의 <누구나 손쉽게…>에는 북측 미그기 귀순 때 전쟁이 터진 것으로 알고 집 안의 벙커에 들어갔다가 흙을 먹게 된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당신이 잠든 밤에>와 ‘당신이 잠든 밤에 2’라는 부제를 단 <국기게양대 로망스>는 앞선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에서 선보인 바 있는 비루한 주인공 ‘시봉’을 다시 등장시켜 낙오자들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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