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한시로 우주의 질서를 노래하다

등록 2006-10-19 20:45

삼라만상을 열치다<br>
김풍기 지음. 푸르메 펴냄. 1만1000원
삼라만상을 열치다
김풍기 지음. 푸르메 펴냄. 1만1000원
입춘에서 대한까지 24절기 담은 한시 고르고 저자의 감상 덧붙여
“서리 내려 나뭇잎 질 때 성긴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는다. 바람에 나부끼는 노란 잎은 옷소매에 점점이 떨어지고, 들새는 나무 우듬지에서 날아올라 사람을 엿본다. 황량한 땅이 이 순간 맑고 드넓어진다.”

조선 중기 문인 상촌 신흠의 글 <야언(野言)>의 한 대목이다. 서리 내리는 절기 상강(霜降) 무렵의 청신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한문학자 김풍기 교수(강원대 국어교육과)의 새 저서 <삼라만상을 열치다>는 입춘에서 대한까지 24 절기를 노래한 한시들을 골라 소개하면서 그와 관련한 지은이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펼쳐 놓은 한시 감상집이다. 앞에서 소개한 신흠의 작품에 이어지는 지은이 자신의 글을 마저 읽어 보자.

“세속의 덧없는 행보에 바쁜 나머지 우리는 생의 아름다운 향기를 얼마나 놓치고 있는가.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자칫 스산한 풍광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비바람 속의 낙엽조차 이 가을을 생동감있는 계절로 변화시키는 것이다.”(213쪽)

책은 이처럼 옛사람들의 한시와 김 교수의 산문 사이의 대화 형식을 취한다. 24 절기에 어울리는 작품을 골라내고 그 무렵의 자연 풍경과 사람 살이의 이모저모, 그리고 지은이 자신의 감정과 사유를 조응시킴으로써 한시에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가령 책의 제목을 가져온 조선 전기 문신 김구의 입춘 시 <문에 붙인 입춘 글귀를 쓰다>와 그에 덧붙인 지은이의 설명은 이러하다.

“사물 때깔은 생생한 뜻 알아/조화로운 봄 기운은 지극히 어진 마음 펼친다./새롭게 삼라만상 열치고/남은 은택 흘러서 사람들에게 미치기를.”

“봄의 기운은 주변의 그늘진 곳까지도 널리 퍼진다. 어떤 사물도 편애하지 않고 삶의 기운을 북돋아주니,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인(至仁)’의 경지를 체현하는 성인과 같은 자세다. 그 은택이 인간에게도 흘러넘쳐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김구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21쪽)

한시 하면 무책임한 음풍농월이 아니면 충효나 예의범절 같은 의무와 구속부터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난의 뼈아픔과 노동의 활력을 노래한 이달과 양만리의 시는 그것이 한갓 선입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각각 소만과 망종 무렵에 해당한다.

“농가의 젊은 아낙 들밥도 없이/빗속에서 보리 베어 풀숲 사이로 돌아온다./생나무 축축해서 불은 붙지 않는데/문 들어서자 딸아이는 옷자락 당기며 운다.”(이달 <시골집>)


“농부가 모 던지면 아낙네 이어받고/어린 아이 모 뽑으면 큰 아이는 모 심는다./삿갓은 투구요 도롱이는 갑옷이라/머리 위로 빗물 흘러 어깨까지 축축하다./아침밥 불러서 잠깐 동안 쉬지만/머리 숙이고 허리 꺾은 채 대답도 않는다./볏모 뿌리 자리 못 잡고 모종 아직 펴지지 않았으니/거위 새끼 병아리 오리 조심해야지.”(양만리 <모심는 노래>)

훗날 남제의 황제를 시해하고 양나라 황제 양무제가 된 소연(464~549)이 쓴 여름 사랑 노래는 어떤가. 사랑 앞에서는 천하의 영웅 또는 악한조차도 섬세한 감성을 자랑하는 시인이 되는 것일까.

“강남에 연꽃 피면/붉은빛이 푸른 물을 뒤덮지요./빛깔은 같아도 마음 다르기도 하고요/연뿌리 달라도 마음 같기도 하지요.”(소연 <자야사시가> 중 여름 노래)

지금은 한로에서 상강으로 넘어가는 무렵. 조선 중기 문신 김세필의 시와 지은이 김 교수의 산문을 잇대어 읽는다. 지은이의 자기 다짐이 이슬인 듯 서리인 듯 서늘하다.

“바람은 처연한데 찬 이슬 무겁고/달은 밝은데 밤 강은 깊다./한 쌍의 노 앞쪽 언덕에 가로놓였으니/석 잔 술에 원대한 마음 일으키노라.”(김세필 <밤에 임진 나루로 배를 띄우며>)

“찬이슬이 내린다고 한곳에 머물러 있다면 어찌 세상에 우뚝 설 수 있겠는가. 먼 길을 떠나기 위해 들메끈을 고쳐 매는 일은 지식인의 일상사라야 한다. 내가 앉은 자리에 안주하여 그 편안함에 길들여지는 순간 내 공부는 쓰레기가 되고 만다. 동시에 마음속의 원대한 뜻도 쓸데없는 오만함으로 변할 것이다. 때가 되면 미련없이 먼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기러기의 날갯짓을 배워야 한다.”(206~7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